이상하에게(부친 이영우에게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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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 서신(한문편지)

날짜 : 193066

소장 경위 : 이동박(이육사의 양자) 기증

 

원문

迎日郡 杞溪面 縣內洞 李相夏 君 開納 親秘

大邱府 南城町 十九 中外日報支局 李活

 

頃進, 因於幹急, 未得穩陪, 施卽奉別, 伏悵何極. 伏未審日內, 堂上從祖主壽韻衛護, 岡陵恰餘, 棣床體候, 以時萬康, 允從諸昆, 爽善侍篤課, 閫庇均迪, 伏溯區區下忱.

重表從姪省候猶節, 僅免大家添損, 弟兄相依, 日夜奔馳, 碌碌沒樣, 而朝無所食, 暮窮所棲, 伏歎無地耳.

第白某件, 百方斡施策中, 豫料似無後慮, 爲叔主不勝欣賀. 非但自矜用力之大, 實由叔主倚望之重. 自此雖有幾個反對者, 當極力撫摩, 使至坦道矣, 休慮伏望.

餘悤撓不備. 上候書.

 

庚午六月六日, 重表從姪

李活 再拜

 

一兩云者, 近作如何樣也? 或自那處, 別無所策耶? 卽時下示, 恐似方便.

 

현대어

  영일군 기계면 현내동 이상하 군 개납 친비

  대구부 남성정 19 중외일보 지국 이활

 

   근래 찾아뵈었습니다만 중요하고 급한 일 때문에 조용히 모시지도 못하고 곧바로 떠나왔으니 섭섭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삼가 요사이 당상 종조부님의 건강이 보호되어 언덕 같은 장수를 누리는 기쁨이 있으시며, 형제분의 체후도 때맞추어 만강하고 윤종 형제들도 잘 시봉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안식구들도 고루 평안한지 살피지 못했으니 아랫사람의 마음에 그리움이 구구합니다.

   중표종질인 저는, 부모님과 숙부님께서는 큰 탈이 없으시지만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보잘 것 없어서 아침에는 끼니거리가 없고 저녁이면 잠잘 곳이 마땅하지 않으니 한탄스럽기 짝이 없을 뿐입니다.

다만 백() 아무개와 관련된 일은 백방으로 알선하고 있는데, 미리 생각건대 뒷날의 근심은 없을 듯하니 숙부님을 위하여 축하드리는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비단 크게 힘을 쓴 것이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숙부님께서 기대하신 것이 중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비록 몇 사람의 반대가 있더라도 마땅히 극력 무마하여 탄탄대로에 이르도록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바쁘고 소란스러워 이만 줄이고 안부편지를 올립니다.

 

  경오년(1930) 66일 중표종질

  이활 재배

 

  두어 번 말씀드린 것은 근래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 그쪽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바로 알려주시면 아마도 방편이 될 것입니다.

 

  *손병희 편저의 이육사 전집 - 이육사의 문학(이육사문학관, 2017)에 수록된 이완규(사단법인 낙강문화 이사장)의 탈초를 따름.

 

당시 이육사의 상황

   대구 청년동맹 간부로 구속 되었던 이육사는 1930119일 석방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18일에 중외일보기자로 임용된다. 419일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임시대회에서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며 517일 있었던 첫 집행위원회에서 상무를 맡게 된다. 대구의 사회단체들과 관련되어 활동하던 이육사가 당시 주요 민간 언론 중 하나였던 중외일보대구지국의 기자로 채용됨으로써 언론을 통해 사회활동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기간은 19318월까지로 길지 않다. 이어서 조선일보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의 근무 기간도 그리 길지는 않은데 19323월까지 기자 활동을 한 후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1934320일자로 조선일보특파원으로 재입사할 예정이었으나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구속되면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위의 편지는 이육사가 중외일보에 근무하던 때인 193066일에 영일군 기계면에 사는 친척 이영우李英雨에게 보낸 것이다. 곤궁한 처지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를 전하고, 이영우와 함께 도모하는 어떤 일에 대한 진행사항을 전하고 있다. 받는 사람은 이상하李相夏이지만 부친인 이영우에게 올리도록 한 것이다. 이영우는 이육사에게 증고종숙曾姑從叔(이동영 박사 표현)이 되는데, 이영우의 조모가 이육사 증조부의 여자 형제가 된다. 호는 해산奚山이며, 성균관 진사進士 이종형李鍾瀅의 아들이다. 이육사는 614일에도 중외일보대구지국을 주소로 하여 영일군 기계면 이상흔相欣에게 엽서를 보낸다. 이상흔의 진학 상담을 해주는 내용으로, 이상흔은 이영우의 아우인 이근우瑾雨의 아들이다. 지난 호에서 이육사의 아우 이원창李源昌이 보낸 엽서들의 수신인이기도 하다.

   위의 편지글에서 당시 중외일보대구지국의 주소가 대구부 남성정 19번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성로이다. 이상호의 주소지인 영일군 기계면은 오늘날 포항시로 편입되었다.


■ 신준영 / 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22-06-10 12:42:32 문학관 아카이브 기행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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