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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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ㅅ기내기」(『정지용시집 』, 1935년, 시문학사)


 

숨기내기

 

정 지 용

 

-ㄹ 눈 감기고 숨으십쇼.

잣나무 아람나무 안고 돌으시면

나는 샅샅이 찾아보지요.

 

숨기내기 해종일 하며는

나는 서러워진답니다.

 

서러워지기 전에

파랑새 사냥을 가지요.

 

떠나온 지 오랜 시골 다시 찾아

파랑새 사냥을 가지요.



   ‘숨기내기는 숨바꼭질의 방언이다. 술래잡기, 술래놀이라고도 한다. 많은 이들이 어릴 때 수도 없이 해 본 놀이일 터. 숨바꼭질, 술래잡기, 술래놀이라는 말과 달리, ‘숨기내기는 놀이가 환기하는 가벼운 재미나 즐거움에 살짝 긴장을 더한다. ‘내기는 겨룸과 경쟁의 세계라, 이기고 지는 것에 따른 쾌감이나 좌절감이 함께한다(물론 비기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승패에 따라 얻거나 잃게 되는 것이 클수록, ‘내기의 과정에서 긴장은 고조되고 뒤따르는 기쁨이나 열패감 또한 커질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의 화자 는 술래이고, 시에 나오지 않지만 의 말을 듣는(다고 독자들이 가정하는, 드러나지 않은 청자) ‘는 숨는다. 이 숨바꼭질이 내기의 형태로 제시돼, 숨는 이와 찾는 이 사이에 긴장이 발생한다. 술래를 자원한 의 숨은 사람 찾기가 해종일”(하루 종일) 이루어지고, 마침내 서러워진다고 하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숨바꼭질은 혼자 하지 않는다. 숨는 사람과 함께 찾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숨바꼭질은 반드시 이 있어야 가능한 사회적놀이이다. 숨바꼭질에서 은 서로 숨거나 찾는다. 숨바꼭질의 이러한 -관계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상황과 조건을 일깨운다.

   숨바꼭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시선이다. 술래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숨을 수 없고, 숨는 이의 눈길을 상상하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다. 숨바꼭질이 계속되는 동안, 술래의 시선은 숨은 사람을 포획하려고 하고, 숨는 사람은 술래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이 겨룸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상대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숨기는 것뿐. 그런데 어린이의 말투가 아닌 합쇼체를 사용해, 숨기내기는 유년의 단순한 놀이를 환기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인간이 경험하는 인간관계의 포장된 밑바닥’(‘은폐기만에 바탕을 둔 -관계)을 암시할 수도 있다.

   ‘를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의 주체성, 그리고 내가 구성하고 향유하는 세계를 단번에 와해시킨다. ‘의 시선에 의한 의 대상화를 피하는 길은 오로지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거나 위장하는 길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온전히 가능하기나 할까. 사회적 인간으로서 는 어떤 방식으로든 과 관계를 맺고, 언제나 의 눈길을 의식하거나 거기에 노출된 채로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숨기내기의 세계는 이제 보상 없이 즐기는 어린이의 유희가 아니라, ‘이라는 두 주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식의 긴장된 겨룸과 싸움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 대해 집요한 탐색을 시도하는 의 욕망과 거기에 대응해 끝없이 자신을 숨기려는 사이에서 빚어지는, 때로는 희극적이고 때로는 비극적인 긴장의 무대이다. 그런 까닭에 에게 은 영원한 지옥”(사르트르J.P.Sartre)이다.

   ‘사이에서 펼쳐지는 시선의 싸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해종일지속되며, 애초부터 해소될 가능성이 없어 서러워질수밖에 없다. 이 슬픈 현실에 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서러워지기 전에에서 알 수 있듯이, ‘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비켜선다. 서로를 대상화하려는 의식의 대결이 더 이상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는 것은, ‘의 이러한 회피 탓이다. 지속되거나 예상되는, 심리적 불안정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현실적인 -관계의 비극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의 선택은 고향 찾아가기파랑새 사냥이다. 떠나온 지 오랜 시골 다시 찾아/ 파랑새 사냥을 가지요.”가 그것. “파랑새는 우리 문화에서 신령스럽고 상서로움을 뜻하는 길조이고,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ck의 동화극 파랑새에서는 행복을 상징한다.

   ‘고향 찾아가기파랑새 사냥이 지닐 나름의 함축과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관계의 근원적인 비극성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살피기 위해 정지용의 시편들에서 고향과거가 지닌 의미의 그물망을 찾아 나서야 할까. 우리 또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시선 투쟁과 서러움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으므로.



군말 

   정지용鄭芝溶(1902-1950)숨기내기조선지광朝鮮之光(64, 1927. 2.)에 실렸다. 내 맘에 맞는 이를 포함해 네 편을 민요시편民謠詩篇으로 묶고, 창작일자가 ‘192410임을 밝혔다. 정지용은 일본 쿄토京都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1926. 6.)카페 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동물등의 작품을 처음 발표했다. 정지용이 휘문고보’(현재 휘문고등학교) 교비장학생으로 쿄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때였다.

   「숨기내기는 정지용의 초기작이다. 스스로 민요시라고 밝힌 것은, 숨기내기를 자신의 본격적인 근대 자유시와 구별하기 위해서일까. 그만큼 구조도 단순하고 서술의 양도 적은 소품인데다, 정지용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숨바꼭질을 그리면서 굳이 합쇼체를 사용한 것은 숨바꼭질의 주체가 성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언어화된 의식은 유년의 유희인 숨바꼭질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꿰뚫는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닐는지.

   정지용의 시는 등단 직후 극단적이고 상반된 평가를 받았고, 이후 이러한 대립적인 평가는 지금껏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김기림은 정지용을 우리의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러 넣은 최초의 시인이라고 추켜세웠으나, 임화는 부루조아 시의 현대적 후예라고 깎아내렸다. 상반된 평가는 시를 언어에 의한 언어’, 곧 언어를 시의 유일한 매체이자 실체로 간주하는 관점과, 시를 언어에 의한 사회적 실천으로 보는 관점이 대립한 결과이다.

   비평의 실천에서, 관점의 대립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예각화할 수도 있지만, 경직되거나 일방적일 경우 오로지 자신의 확신을 진리로 변경”(사르트르)하려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시의 방법이나 실천에서 정지용의 작품이 여전히 유효성을 지닌다고 믿는 이들에게, 정지용은 현대시의 기점이다. 정지용은 사춘기를 지나서부터는 일본 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여 시를 썼다, 해방 후 고백했다. 따라서 당대 정치현실을 배제한 정지용의 시를 식민지 시대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예술적 상응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정지용은,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작품을 쓴 것은 최소한도의 조선인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해금될 때까지, 6·25전쟁 때 자진 월북했다는 혐의로 접근이 불가능한 금지 품목이었다. 속된 말로 야미’(일본어 ‘, 흔히 야매/야메라고도 하며, 순화 표현은 뒷거래이다.)까지 막지는 못 했지만, 오랜 기간 정지용과 그의 시는 한국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정지용은 전쟁 중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이광수등과 평양감옥에 수용된 후 폭사했다고 한다.

   덧붙이면, ‘아람나무아람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라고 한다.

 

■ 손병희 / 이육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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