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킨 빛줄기를 따라가면 보이는 꿈
작성자 정보
- 작성일
- 조회 246
- 작성자 관리자
컨텐츠 정보
본문
내가 11살 때, 언니가 영어 공부를 위해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를 틀어줬다. 자막 없이 원어로 나오는 영화를 알아듣지 못해도 그냥 쭉 보는 방법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언니는 그때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있었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 애니메이션 <원피스>를 자막 없이 보고 나서 일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언니는 그걸 ‘귀가 뚫렸다’고 표현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영어 공부에 흥미를 갖고 있단 걸 알았던 언니는 내 귀도 뚫릴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적용해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를 틀어준 것이다. 나도 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제일 좋아했고,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던 터라 언니가 틀어주는 대로 영화를 봤다.
그때 처음 본 영화가 <라푼젤>(Tangled, 2010)이었다. 빛나는 꽃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영화 속 장면은 어린아이의 눈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라푼젤의 어린 모습 또한 신비함으로 가득했다. 들리는 말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나는 그저 빛을 따라가며 계속 영화를 봤다.
영화 <라푼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라푼젤> 포토*)
원작인 동화 <라푼젤>의 내용을 잘 몰랐다. 머리카락이 아주 긴 공주가 나온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영화 <라푼젤>이 내가 처음 만난 라푼젤이었고, 영화를 본 뒤에야 원작의 내용을 찾아봤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특유의 뮤지컬 같은 형식은 금세 어린 나를 빠져들게 했다. 달려가는 라푼젤의 머리카락 뒤로 ‘Tangled’라는 타이틀이 나오며 오프닝 곡인 ‘When Will My Life Begin?’과 함께 영화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영어 공부를 하려고 본 영화였는데, 그 나이에 접한 영화는 오히려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의 확고한 취향이 되었다. 이후에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부터 <레이디와 트램프>, <라이온 킹>, <포카혼타스> 등 다른 디즈니 영화들을 봤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그림체를 계속 보면서 디즈니의 감성과 캐릭터들을 좋아하게 됐다. 그중 <라푼젤>은 몇 번이고 보고 또 봤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라푼젤>을 자막과 함께 보기도 했고, 영화 속 노래들도 매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나만의 취향이 생긴다는 사실은 신나고 들뜨는 일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라푼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내겐 라푼젤이 이런 기억으로 남아 감동을 주는데, 다른 사람들에겐 어떤 감동이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의 캐릭터 중에서도 라푼젤을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아마 라푼젤이 늘 말하는 ‘꿈’ 때문일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공부 방법을 말하며 시작했지만, 뒤에 이어질 내용은 영어 공부에 관한 것도 아니고, <라푼젤>의 줄거리 요약도 아니다. <라푼젤>이 어떻게 많은 이들에게 짙은 감동을 주고, 한 사람의 취향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라푼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빛’이다. <라푼젤> 속 빛은 여러 갈래로 등장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전설의 꽃과 그 효과로 인한 라푼젤의 머리카락, 왕과 왕비가 라푼젤을 그리워하며 띄우는 등불, 라푼젤에게 씌워질 왕관이다. 모두 빛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라푼젤>의 주요 인물들과 연결된다. 이 빛을 원하는 자들이 각각 존재한다. 전설의 꽃과 라푼젤의 머리카락은 마녀 고델이 차지하고자 한다. 등불은 라푼젤이 꿈꾸던 것이다. 왕관은 유진이 훔친 물건이다. 인물들과 ‘빛’이 나는 소재들, 그리고 <라푼젤>의 주제를 관련지어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라푼젤>에서 ‘빛’은 ‘꿈’을 의미한다.
빛을 보며 꿈이 생긴 소녀
주인공 라푼젤은 탑 안에 갇혀 창밖을 본다. 자신의 생일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빛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걸 실제로 보고 싶다는 꿈이 생긴다.
라푼젤에게 빛이 꿈이라는 것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진을 만나 라푼젤은 그 빛이 잃어버린 공주를 위해 띄우는 등불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유진이 밖으로 나온 라푼젤을 어느 주점에 데려가는데, 그 안에서 서로 싸우는 폭력배들을 말리며 라푼젤은 그들에게 꿈을 가져본 적이 없냐고 묻는다. 한 명씩 자신의 꿈을 말하며 부르는 노래인 ‘I’ve Got a Dream’에서 라푼젤은 나도 꿈이 있다며 떠다니는 등불들을 보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노래한다.
이 꿈은 라푼젤이 탑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장치에 해당한다. 유진을 따라 탑을 나온 라푼젤은 잔디를 밟는 것조차도 무서워하다가 잔디를 뒹굴고, 연못에 있는 연꽃을 보며 좋아하다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밖에 나온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마치 꿈꾸던 일을 시작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쫓던 꿈에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연꽃을 보는 것처럼 기분 좋게 시작한 일도 어두운 동굴 안처럼 언제 나를 집어삼킬지 모른다. 라푼젤이 탑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는 상황은 우리가 꿈에 다가가는 과정을 투영한 것이다.
이렇듯 <라푼젤>에서 빛은 꿈을 나타내는데, 꿈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이미 이전의 디즈니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유독 <라푼젤>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꿈을 그려내는 방식이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직접 꿈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데, 이를 어리숙하지만 호기심도 많고, 당돌하고 도전적인 공주라는 캐릭터와 함께 섞어 표현했다.
영화 <라푼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라푼젤> 포토**)
비슷한 맥락에서 추가로 라푼젤의 캐릭터가 갖는 요소를 살펴보자면, 라푼젤은 디즈니 영화 속 공주의 전형적인 모습을 탈피한 인물이다. 라푼젤은 당차고 적극적이며 다부진 면모를 보인다. 겁을 내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는 탑에 갇혀 지낸 세월로 인한 것일 뿐 라푼젤은 이전의 디즈니 공주들과 비교한다면 매우 용기 있는 인물이다. 탑에 들어온 유진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순간에서도 그 모습이 나타난다. 처음 보는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협상까지 한다. 탑을 벗어난 라푼젤은 유진보다 앞장서며, 유진의 다친 손을 치유하고, 유진을 구해준다. 왕자님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리던 이전의 공주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라푼젤이 보여주는 디즈니 공주의 전형성 탈피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라푼젤이 먼저 유진에게 입을 맞추는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영화 속 캐릭터의 변화가 사람들에게 닿아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꿈’이라는 주제와 조화롭게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엄마가 마녀가 된 이유
위에 붙인 소제목이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 사실 마녀인 고델이 엄마로 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스토리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라푼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엄마가 마녀임이 밝혀진 것이다.
고델은 오로지 빛만 바라보는 인물이다. 젊음을 유지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어린 라푼젤을 납치하고, 탑에 가두며 그 이후엔 자신을 방해하는 누구든 죽일 계획을 한다. 라푼젤이 가진 빛이 곧 고델의 꿈이지만, 그것을 꿈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긴 어렵다. 꿈이 변질되어 다시 풀어질 수 없는 욕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최후는 빛이 끊어지면서 나타난다. 유진이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을 유리 조각으로 잘라내면서 젊음을 유지하던 고델은 순식간에 늙게 되고 결국 탑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라푼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델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잠시 지나가는데, 이 장면 또한 묘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못된 마녀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을 18년 동안 길러준 사람이 늙어가며 죽는 모습을 보는 건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푼젤도 “Did I mumble, mother? Or should I even call you that?(제가 또 웅얼거렸나요, 엄마? 아니, 내가 엄마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이라고 직접 말했다.
고델도 꿈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꿈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욕망에 불과했다. ‘꿈’을 이야기하는 <라푼젤>은 고델의 모습을 통해 자기가 가진 그 꿈이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전해주고 있다.
헛된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꿈이 생길 때
유진은 왕실의 왕관을 훔친 도둑이다.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동료들까지 배신하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의 악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가 왕관이 아닌 라푼젤을 구한다. 유진은 빛나는 왕관을 훔치겠다는 단순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고델의 경우에서 보았듯 욕망도 꿈이 변질되어 나타난 것으로 여겨 꿈의 한 종류라고 본다면, ‘<라푼젤> 속 빛은 꿈이다.’라는 문장은 유진에게도 성립한다. 그러나 유진에게 꿈은 왕관이 아니다.
우연히 라푼젤을 만난 후 유진은 새로운 꿈이 생긴다. 그에게 새로 생긴 꿈은 라푼젤이다. 순수하고 쾌활한 그녀를 만나 마음을 열고, ‘플린’은 가명이고 ‘유진’이라는 본명을 알려주며 고아였다는 자신의 과거까지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라푼젤의 생일, 등불을 보며 라푼젤과 유진이 부르는 <라푼젤>의 메인 OST인 ‘I See the Light’의 가사에서도 유진의 꿈이 라푼젤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헛된 꿈을 좇던(chasing down a daydream)’ 그가 ‘별빛들(등불) 사이에서 빛나는(she’s here shining in the starlight)’ 라푼젤을 바라보며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새로운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결국 빛을 쫓는 사람들
<라푼젤>의 후속작도 존재한다. <라푼젤 그 후 이야기>(Tangled Ever After, 2012)로, 여기서도 역시나 빛이 등장한다. 바로 라푼젤과 유진의 빛나는 결혼반지다. 파스칼과 막시무스가 실수로 떨어뜨린 반지를 어떻게든 구하려고 달려가며 소동을 벌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어지는 후속작에서까지 빛이 등장한다니, <라푼젤>의 스토리에서 여전히 ‘빛’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시무스와 파스칼이 반지를 구하기 위해 허덕이며 쫓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네 모습과 비슷하게 보인다. 또 나와 비슷하다고도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영어 공부를 한다며 영화를 보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나는 이제 그때의 언니 나이가 되었다. 영화를 틀어줬던 언니는 몇 년 뒤 일본으로 떠나 취직을 했고, 5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곳저곳을 누비는 언니와 나는 마치 파스칼과 막시무스처럼 무언가를 자꾸만 쫓고 있다. 내가 <라푼젤>을 처음 보던 때, 그 어릴 때 반짝이던 꿈을 마침내 되찾을 때가 온 것 같다.
■ 홍수현 / 외부청년편집위원
*출처: 네이버 영화, <라푼젤> 포토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809109&qvt=0&query=%EC%98%81%ED%99%94%20%EB%9D%BC%ED%91%BC%EC%A0%A4%20%ED%8F%AC%ED%86%A0
**출처: 네이버 영화, <라푼젤> 포토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809109&qvt=0&query=%EC%98%81%ED%99%94%20%EB%9D%BC%ED%91%BC%EC%A0%A4%20%ED%8F%AC%ED%86%A0
관련자료
-
다음글작성일 2022.04.02
-
이전글작성일 2022.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