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정신과 얼이 살아 숨쉬는 곳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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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안동에서 살아온 나는 20대 초반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안동을 떠나 지낸 적이 있다. 지금도 그 22개월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안동을 지키는 내가, 안동을 벗어나봐야 고작 2, 3일 길게는 일주일에 그치는 내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오랜 시간 안동을 떠나 있었을까? 22개월이라는 숫자를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겠지만 그 기간 동안 나는 대한민국 육군에 복무했었다. 내가 복무한 곳은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무적태풍부대…….(나머지는 국가기밀이므로 비밀로 하기로 한다.) GOP에서 밤을 새워 근무를 하며 외로움과 고독과 싸웠고, 별과 달과 구름과 친구가 되었다는 식상한 말은 그만두고, 군대에서 내가 12(?)을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책 한 권을 써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내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특이했던 것은, 같은 중대에 경상도 사람도 많이 없었지만 특히 안동을 고향으로 둔 사람은 전무후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선임병들에게 고향을 말할 때면 항상 우스갯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제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입니다.”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꼭 누군가는 , 안동 사람들은 다 한복 입고 다니는 거 아니었어?, 너도 갓 쓰고 다녔냐?”하는 ! 마이 갓!’을 외치고 싶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던지, ! 군대에서 선임병을 상대로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된 말로 개길 수도 없고……. 이러한 선임병들의 농담은 내가 상병이 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때는 그 농담들(어쩌면 진담일지 모를…….)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안동이라는 단어가 발음됨과 동시에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 아마도 당시 안동에 대한 이미지는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이 전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아마 20대 초반의 나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네 맞습니다. 제 고향은 하회마을의 운치와 도산서원의 얼이 살아 있는 경상북도 안동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하회마을이 가진 전통과 도산서원이 가진 정신은 이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당당한 안동의 자랑이 되었다.(안동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 세 개가 있다. 2010년 등재된 하회마을, 2018년 등재된 봉정사, 2019년 등재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유교책판은 2015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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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에서도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한국의 정신을 받들어 온 성지로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의 교육을 담당해 온 곳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설립한 도산서당이 있던 자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뜻으로 사후 4년만인 1574년에 세워졌다. 1575년에는 한석봉이 쓴 현판을 선조로부터 사액 받으며 조선의 정신과 성리학의 근본을 지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도산서원은 안동시청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렇기에 도산서원을 찾아가는 길은 차 안에서도 낙동강이 만든 자연의 품으로 뛰어드는 느낌을 만끽하기 충분하다.(누군가 자연은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던가? 차를 타고 도산서원을 찾아가는 동안 이런 경치에서 공부했다면 서울대는 거뜬히 합격하지 않았을까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차를 세우고 도산서원을 찾아들어 가는 길은 왼쪽에는 영지산이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품어주는 고즈넉한 길이었다. 조금 걸어가자 강 건너 단을 쌓아올린 조그만 봉우리 위에 집 한 채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옮겨 놓은 것만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강 건너 아득히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건물은 시사단(試士壇)’으로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별히 시행한 과거시험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치른 장소다. 과거에는 단 밑으로 송림이 펼쳐져 있었지만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만이 10M 높이의 축대를 쌓고 남아 있다. 강 한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시사단의 모습도 절경이지만, 칠천 여명의 선비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치르는 장대한 광경을 생각하자 그들의 기개가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시사단을 지나자 도산서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마치 성리학의 대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회를 여는 듯한 운치를 풍겼다. 도산서원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세 개의 샘을 지나쳐야 하는데, 첫 번째 샘은 도산서원의 식수를 담당하던 열정(冽井)’이라는 우물이다. 우물에도 이름을 붙여주고 가르침을 담으려했던 퇴계 선생의 세심한 배려, 우물에는 지식의 샘물을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부단한 노력을 통해 심신을 수양해야한다는 배움에 대한 퇴계선생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두 번째는 몽천(蒙泉)’이라는 조그만 샘물로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퇴계 선생의 교육 철학이 담긴 샘물이다. 마지막은 정우당(淨友塘)’으로 연꽃을 심어놓은 연못으로 연꽃은 진흙 속에 묻혀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고, 속은 말끔히 비고, 줄기는 남을 의지하지 않아도 곧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은 우리네 선비 같은 꽃이다. 도산서원 곳곳에는 매일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교육이 되도록 배려한 퇴계 선생의 교육철학이 담겨있었다.

   세 개의 샘물을 지나면 퇴계 선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마주할 수 있다. 선생이 4년에 걸쳐 짓고 몸소 거처하며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했던 바로 그곳, 도산서원의 시작이 되었던 곳을 만날 수 있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한다. 말 그대로 즐거움을 사랑하던 선생의 마음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퇴계 선생의 숨결과 흔적이 느껴지는 도산서당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조선시대 올바른 선비의 길을 배우기 위해 몰려든 유생들이 공부하던 서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면에는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 전교당(典敎堂)’이 있는데, 전교당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서원의 첫 번째 기능인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전교당의 양 옆으로는 좌우 대칭을 이룬 건물들이 정갈하게 서 있는데, 유생들이 거처하던 서재(西齋)’와 책을 보관하던 서광명실(西光明室)’이다.

   서원에 뒤편에는 서원의 또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상덕사는 퇴계 선생과 그의 제자인 월천 조목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는 선생을 기리는 향사를 지낸다.

   이외에도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향사를 지낼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전사청(典祀廳)’, 서원 관리인들의 살림집인 하고직사(下庫直舍)’ 등 서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이 있어 퇴계 선생의 철학관, 교육관과 생생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서원을 둘러보며, 퇴계 선생의 교육철학을 생각하며 나는 성리학, 그것도 ()로써 기()를 다스린다는 선생의 이기이원론적 주리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고, 모든 사물을 순리로 운영해 나가야한 한다는 지금도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불변의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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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교육이란 우리의 최대 관심사였다. 또한 앞으로도 교육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교육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당장 도산서원을 찾아 교육에 최선을 다했던 퇴계 이황 선생의 교육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며 발전시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위에 언급한 각각의 건물에는 현판이 붙어 있다. 퇴계 선생이 직접 쓴 글씨도 있고, 한석봉 선생이 쓰고 선조가 사액한 현판도 있다. 그리고 이 현판들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각 건물이 가진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서도, 퇴계 선생이 남긴 수많은 일화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서원 곳곳에 숨어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발견하는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김균탁 / 이육사문학관 학예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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