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창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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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 서신(엽서)
규격 : 9cm×14cm
날짜 : 1930년(소인 1930.3.15.)
소장 경위 : 경매를 통한 구입(2021)
원문
받는 사람 : 迎日郡 杞溪面 縣內洞 李相欣 君
보내는 사람 : 大邱 南山町 六六二-三五 李源昌
君아! 날을 긔다려 바라든 試驗이 와서 모든 人生에게 失望을 쥬는 것이 무슨 幸福이랴? 그르타고 失望을 하지말어러라 아즉 나이 멀엇는대 무슨 큰 妨害가 되랴만은, 또 게속 하여서 더하여 보아라 京城中東學校에 入學 願書를 제출 하렴,! 그랜다면 여긔서도 다소한 運動을 계속하리라! 사곡아재도 京城 열 生覚이 게시는듯 하니 그리 알어라! 엇제든지 君이 빠를여랴. 사진 백힌 것은 곳처 보낼터이니까 一円만 付送하라! 할 말이 태산 갓흐나 속이 답답해서 못한다.
현대어
군아! 날을 기다려 바라던 시험이 와서 모든 인생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무슨 행복이랴? 그렇다고 실망을 하지마라. 아직 나이 멀었는데 무슨 큰 방해가 되랴마는, 또 계속 하여서 더하여 보아라. 경성중동학교에 입학 원서를 제출 하렴! 그런다면 여기서도 다소한 운동을 계속하리라! 사곡아재도 경성(서울) 갈 생각이 계시는 듯하니 그리 알어라! 어쨌든지 君이 빠를여랴. 사진 박힌 것은 고쳐 보낼 터이니까 1엔만 부송하라! 할 말이 태산 같으나 속이 답답해서 못한다.
형태 : 서신(엽서)
규격 : 9cm×14cm
날짜 : 1930년 4월 18일 혹은 19일
소장 경위 : 경매를 통한 구입(2021)
원문
받는 사람 : 迎日郡 杞溪面 縣內洞 李相欣 君 轉交
보내는 사람 : 於 大邱 李源昌
君아! 日間에는 그곳 消息이 끈어지니가! 답답하다. 요 日氣 溫和한데 兩位分 氣体候 一安한지! 君도! 健康한가! 學校는 엇지 하엿는가 올터인가 안이올터 인가? 사진갑 바드러 每日 一次式은 오는대 대단히 민망하다 될슈잇그든 未安하다만 二円만 付送하여 쥬면 죳켓네! 二十八日內로 붓처다오?
현대어
군아! 일간에는 그곳 소식이 끊어지니까! 답답하다. 요 일기 온화한데 양위분 기체후 일안한지! 군도! 건강한가! 학교는 어찌 하였는가 올 터인가 아니 올 터인가? 사진 값 받으러 매일 일차씩(한번씩)은 오는데 대단히 민망하다 될 수 있거든 미안하다만 2엔만 부송하여 주면 좋겠네! 28일 내로 부쳐다오?
형태 : 서신(엽서)
규격 : 9cm×14cm
날짜 : 1930년 5월 26일
소장 경위 : 경매를 통한 구입(2021)
원문
받는 사람 : 迎日郡 杞溪面 縣內洞 李相欣君 轉交
보내는 사람 : 大邱 잇는 李 로서
君아? 日間에 엇든가 먼저번 片紙 보고 答하엿드니 바덧는지? 그間 大小家와 君도 一安하신지!! 먼저번 片紙에도 말하엿스나 學校에 大大的 調査를 하여본즉 只今이라도 入學할 수 잇으니가 될슈잇는 대로는 곳오면 되겟으니 렴려말고 오시압? 사진은 안즉 찻지 못하엿네? 나도 只今 病床에 누엇다. 未安하지만 答을??하면? 一九三0.五.二六
현대어
군아? 일간에 어떤가 먼저 번 편지 보고 답하였더니 받았는지? 그간 대소가와 군도 일안하신지!! 먼저 번 편지에도 말하였으나 학교에 대대적 조사를 하여본즉 지금이라도 입학할 수 있으니까 될 수 있는 대로는 곧 오면 되겠으니 염려 말고 오시압? 사진은 아직 찾지 못하였네? 나도 지금 병상에 누웠다. 미안하지만 답을??하면? 1930. 5. 26
당시 이육사의 상황
위의 엽서들은 이육사의 6형제 중 다섯째인 백뢰白雷 이원창李源昌(1914~?)이 친척인 이상흔李相欣에게 보낸 것들이다. 이원창은 1930년대 중후반에는 《남선경제일보》 인천지국과 《조선일보》 인천지국, 1940년대 초에는 《매일신보》 인천지국의 기자 등 여러 언론사에서 종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장조카 이동영에 의하면 《조선중앙일보》 정경부장과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였다고도 한다. 1944년 1월에 이육사의 유해를 북경에서 인수해 귀국했으며, 1946년에는 자신의 삼남 ‘동박東博’으로 하여금 이육사의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집안사람들에 의하면 조봉암의 비서관을 지낸 것으로도 전해진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전에 형 이원일과 이원조를 만나기 위해 월북 한 이후 연락이 끊겼는데, 황해도 ‘해주’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엽서들이 쓰인 1930년에는 이육사가 첫 아들 동윤東胤을 낳은 해이다. 1월 3일에는 이육사의 첫 시로 알려진 <말>이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광주학생항일투쟁이 파급되자 1월 10일에 대구청년동맹간부로 구속되었다(중외일보, 1930.1.21)가 1월 19일에 이상쾌李相快, 정윤鄭潤 등과 함께 방면되었다. 이때는 이원삼李源三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월 18일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하였다. 3월 6일 대구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6월 6일에는 ‘대구부大邱府 남성정南城町 19 중외일보지국 이활’을 발신자로 영일군 기계면 현내동 사는 친척 이상하李相夏 앞으로 그의 부친 이영우李英雨에게 전하는 한문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는 곤궁한 처지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를 전하고, 이영우와 함께 도모하는 어떤 일에 대한 진행사항을 전하고 있다. 6월 14일에는 이원창이 보낸 엽서의 수신인과 동일 인물인 이상흔에게 역시 ‘대구부 남성정 중외일보지국 이활’을 발신인으로 적은 엽서를 보냈다. 이 엽서에서는 이원창의 엽서 내용과 맥을 같이하여 이상흔의 학교 진학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있다. 10월에는 ‘이활李活(대구大邱, 이육사二六四)’이라는 필명으로 『별건곤別乾坤』에 시사평론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單體槪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신준영 / 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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