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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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앗슴니다(『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 용 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나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설움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살갗이 벗겨진 사람’(롤랑 바르뜨)이다. 살갗이 벗겨지면, 미세한 자극에도 너무나 쓰리고 따갑지 않던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이나 말 한마디에, 전전긍긍하거나 전전반측하고 때로는 한없이 예민해져 온 존재가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듯, 깊은 내상을 입은 적은 없는가.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신을 방어할 피부를 상실한다. 이를 롤랑 바르뜨는,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이라고 했다. 과연 살갗이 벗겨진 사람은 바람 한 자락, 물 한 방울이 닿기만 해도, 아프고 또 아프다!

   사랑하는 이는 왜 살갗이 벗겨진상태가 되는 걸까. 사랑은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기 때문일까. 우리의 바람과 달리, 사랑은 늘 이별과 파국의 가능성에 직면해 있으니. 그래서 김소월은 느닷없이 닥칠 이별을 예감하며, 그때 할 일을 미리 준비하고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겠는가. ‘나 보기가 역겨워’ ‘이 떠날 그때, ‘가실 길에꽃을 뿌리겠다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사랑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불안과 통증의 늪으로 밀어 넣거나 일찌감치 약삭빠르게, 혹은 현명하게 자기방어의 슬픈 성벽을 스스로 쌓게 만든다.

   그런데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사랑하는 사람 는 그런 자기방어나 살갗이 벗겨진상태를 보이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살갗이 벗겨진데서가 아니라, 가난과 폭력에서 비롯한다. ‘이웃은 가난한 거지로 취급하고, ‘인격생명을 부정한다. ‘능욕하려는 장군, ‘민적도 없다고 인권정조마저 부정한다.

  거기에 항거하는 격분이 끝내 설움이 되는 것은 항거격분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력한 탓일 터. 그러나 이러한 설움은 온갖 윤리, 도덕, 법률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잉태한다. 그것은 정신적 초월이나 인간역사의 부정과 전복, 그리고 일시적이고 기만적인 현실망각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와 같이.

   인간의 정신과 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사유, 선택과 결단에 이르는, 이 운동하는 의식의 계기이자 중심에 당신이 있다.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이미 떠나고 내 곁에 없는데, 없는 당신는 이렇게 느닷없이 대면하는가? ‘당신을 잊지 않고,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용운은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님의 침묵)라고, 이미 고백한 적이 있지 않은가.

   잊지 않고 보내지 않은 , 오래전부터 내 곁에, 내 속에, 내 존재의 일부로 곳곳에 스며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떠난 은 내 안팎에 지금껏 없이 있고’,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가난과 폭력 앞에서 내 존재 전체가 부정될 때, 이렇게 없이 있는’ ’은 내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폭력으로 가득 찬 인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실존적 결단으로 를 이끈다. 한층 더 구체적인 2인칭 당신이 되어 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그 표정은 어떨까? 나의 억울함과 고통을, 거기에서 비롯하는 나의 쏟아지는 눈물을 함께 아파하는, 연민으로 가득 찬 낯빛일까. 그 고통을, 그 억울함을 알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따스하지만 슬픈 눈빛일까. 아니면 슬픔을 털고 일어나라고, 망설이지 말고 선택하고 결단하라고, 낮은 목소리로 격려하고 어루만지는 것일까.

   오늘 우리는 그런 당신을 마음속 깊이, 흔적으로라도 지니고 있을까. 그리고 때로 우리가 다른 어떤 이에게 한순간만이라도 그런 당신이 되었던 적이, 혹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나 한 걸까.

  군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97-1944)은 승려이자, 1919년 삼일운동 때 조선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린 항일투사이다. 문인을 자처한 적은 없을 듯하지만,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해 흑풍黑風, 박명薄命등의 소설과 심우장만필에 실은 수필과 기행문 등 여러 갈래의 글을 많이 남겼다. 또한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등의 책과 유심등의 잡지를 내기도 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는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서 우리 겨레가 겪은 참혹한 삶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한때 늘어난 미곡 생산량과 달리 1인당 소비량은 현저히 줄어, 식민지 민중 대부분이 거지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소월의 나무리벌의 노래가 보여주듯, 드넓은 재령평야를 두고서도 간도 등 해외를 떠도는 유이민이 된 것도 일제의 그러한 경제적 착취와 수탈 탓이다.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은 민적없는 존재, 그야말로 있지만 없는 존재이다. 일제의 자본과 권력의 폭압은 이들에게서 인격’, ‘인권’, ‘생명’, ‘정조를 박탈했다. 이러한 일제의 윤리, 도덕, 법률은 결국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겪는 능욕의 경험이, 현실에 대한, 인간 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사색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허망하지 않겠는가.

   해방이 되고, ‘있지만 없던 존재들도 마침내 민적/국적을 회복했다. 그러나 정치적 광복만으로 인간역사의 억압과 차별, 그리고 폭력이 쉽사리 해소될 리 없다. ‘윤리, 도덕, 법률칼과 황금을 숭배하는, 강고한 야만의 구조 또한 쉬 사라질 리도, 물론 없다. 처지가 바뀌어 한때의 피해자가 이제는 장애인, 빈민,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이방인, 이교도, 난민 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폭력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어느덧 폭력의 주체가 되는, 끔찍한 현실이 우리 앞에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일제의 폭력 앞에서, 한용운이 그린 해방된 조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보다 우리 겨레가 피해자의 처지에서 벗어나는 것과 함께 모든 인간이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지 않았을까. 이 세상의 고통 받고 외로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보내려고 했던, 이육사의 시 황혼이 다시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 손병희 / 이육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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