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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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소. 긴 잠을 잔 것 같지는 않소. 깜빡 졸았던 것 같은데 길고도 긴 꿈을 꾸었소. 꿈에는 내 고향집이 있고, 사랑 마루에 할아버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소, 할아버지 옆에 비녀를 꽃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닌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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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생가>


   들리는 말에 몇 해 전, 홍수가 나 집이 엉망이 되었다고 하던데 꿈에서는 멀쩡하더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랑채 마루에서 나를 정답게 맞아주셨소. 나는 영문도 모르고 조부모께 인사를 드리고 집안으로 들어갔소.


   부엌에 밥 짓던 어머니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소. 나는 무척이나 반가워서 부엌 안으로 뛰어 들어갔소. 어머니는 밥을 짓는지 아궁이에 불을 때고 계셨소. 내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구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머니와 정다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 같소.

 

   아버지는 안채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셨소. 하늘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몇 번 끄덕하셨소.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있소. 특히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그런 것이 있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몇 번 끄덕였소.

   나는 개구쟁이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소. 방안 이불속에 형이 누워 있었소. 얼마 전에 죽은 원기형이었소. 형은 꼬맹이같은 모습으로 이불속에 누워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가락을 까닥였소. 나는 두말하지 않고 아랫목에 깔린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갔소. 그곳은 어머니의 젓내음이 묻어있는 제일 평화로운 곳이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장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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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형제들>


  형과 함께 아랫목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의 평온을 한껏 맛보려고 하는 순간 나는 돌연 꿈에서 깨어났소.


   여긴 춥고 습기 차고 어두침침한 감옥이외다. 곰팡이가 피어올라 거뭇거뭇한 벽에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감옥이외다.

 

   방금 전까지 내 고향 방에 누워 호사를 누리고 있었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외다. 천당과 지옥이 찰라의 순간에 바뀌어 나는 불시에 지옥 끝까지 떨어진 듯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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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카드>


  태어나 39년간의 생애에 17번 옥살이. 나는 일제가 강제로 빼앗아 간 조국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오. 내가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빌어먹은 세상은 자꾸만 나를 음습한 감옥에 가두어 놓는구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죽은 이들이 보인다고 했소. 내가 감옥에 들어와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은 지가 오래 되었고, 근래 내 기침하는 병세가 심해지는 것을 보면 내가 죽을 날이 가까워온 듯도 싶소.

 

   죽음이란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불시에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니 내 운명이 어찌될 것인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오.

  “이원록.”

  감옥문이 열리더니 간수들이 들어왔소. 손에 들린 족쇄와 포승줄, 용수를 보니 어딘가로 이동할 모양이오.

  “베이징으로 간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오. 무기 반입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간다니, 이곳에서 나에게 행한 모진 고문들로 부족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낯선 이국까지 나를 데려가는 이유를 알 길이 없소.

  간수들이 내 몸을 포승줄로 묶고 재차 손과 발에 수갑을 채웠소. 마지막으로 내 머리에 용수를 씌웠소. 대나무 소쿠리처럼 생긴 용수를 쓰면 작은 틈이 내게 허락된 세상이오. 나는 눈을 가린 말처럼 세상과 차단되어 나를 묶은 포승줄에 끌려가는 수 밖에는 없소. 대체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들은 나를 이렇게 모질게 대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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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와 족쇄>


   나는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호송트럭에 올랐소. 나와 같은 죄인들을 태운 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였소. 베이징으로 가려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야 하오. 젊은 시절 나는 중국을 마음껏 다닐 수 있었소. 만주, 봉천, 북경과 남경까지. 그 넓은 광야에서 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지사들을 수도 없이 만났소. 약산 김원봉, 허형식 등등, 난 펜을 휘두르며 살아왔지만 만주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총을 들고 앞장서서 일제와 싸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소.


   나라가 없는 이에게 자유란 본래 존재할 수 없는 것이오. 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자유가 없는 사람이외다. 내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도 없소. 내가 볼 수 있는 세상도 한정되어 있소. 용수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이 그들이 내게 부여한 세상이외다. 일제는 날 완전히 속박시키려 하지만 내 마음마저 속박시킬 수는 없을 것이오.

호송트럭이 멈추었소. 트럭에서 내려 역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소.

   “옥비 아버지.”


   난 걸음을 멈췄소.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소. 옥비는 내가 37살 무렵 늘그막에 본 외동딸이외다. 나는 그 아이에게 욕심 없이 담담하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옥비(沃非)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소. 올해 3살이니 가장 예쁠 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아이와 아내가 눈앞에 와 있는 것이오.


   “아빠. 아빠.”

   용수의 틈새로 내 아내와 7촌 아재인 이규호의 등에 업힌 옥비가 보였소. 나는 뽀얗고 예쁜 아이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없소. 손짓하여 옥비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도 없소. 옥비도 내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오. 부녀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한탄스럽소. 하지만 이것이 자유를 빼앗긴 사람, 나라 없는 이의 설움 아니겠소?

   “아버지. 다녀오마.”


   간수의 재촉에 아내와 옥비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소. 옥비의 얼굴이 아른거리오. 하지만 묶인 자가 자유가 없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오.


   나를 태운 기차는 베이징을 향해 달려갈 것이오. 이제 생각하니 그들이 나를 베이징으로 보내는 이유를 알 것 같소. 그들은 나를 이 땅과 격리시킬 모양이오.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모양이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들도 짐작한 모양이오.

   아침에 꾸었던 꿈이 마음에 걸리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죽은 이들이 보인다고 하는데, 나는 내 딸 옥비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내 나라는 독립이 될 수 있을까요? 내 꿈은 이루어질까요? 알 수 없는 일이오. 알 수 없는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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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비 여사>


        권오단 / 이육사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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