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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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특별하게 좋아하는 취미나 물건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시계, 지갑, 장난감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하긴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살아온 삶과 성격에 따라 취향에 맞는 물건 하나쯤은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육사 선생도 특별하게 애착을 가지는 물건이 있었다.


   우리가 시골 살던 때 우리집 사랑 문갑 속에는 항상 몇 봉의 인재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우 수산(水山:원일)군과 여천(黎泉:원조)군은 그것을 제각기 제호를 새겨서 제 것을 만들 욕심을 가지고 한바탕씩 법석을 치면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장래에 어느 놈이든 글 잘하고 서화(書畵) 잘하는 놈에게 준다"고 하여서 놀고 싶은 마음은 불현듯 하면서도 뻔히 아는 글을 한번 더 읽고 글씨도 써보곤 했으나, 나와 여천은 글씨를 쓰면 수산을 당치 못하고 인재(印材)는 장래에 수산에게 돌아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 수필 「연인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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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 육사는 할아버지 치헌 이중직의 사랑 문갑 속에 있던 도장을 탐내던 장난꾸러기였다. 그가 도장에 특별한 애착이 있다는 것은 그의 수필 《연인기》에 다루고 있거니와 이로 인해 어린 시절 육사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까지 배웠던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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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는 자신의 재주가 원일에게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0여 년간 도장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살아온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며 보통사람과 같은 일상을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던 육사에게 잊고 있던 도장에 대한 애착이 살아나는 계기가 생긴다.  

 

  그 때 봄비 잘 오기로 유명한 남경의 여관살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나는 도서관을 가지  않으면 고책사(古冊肆)나 골동점에 드나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얻은 것이 비취인장(翡翠印章) 한 개였다. 그다지 크지도 않았건만 거기에다가 모시 칠월장(毛詩 七月章) 한편을 새겼으니 상당히 섬세하면서도 자획이 매우 아담스럽고 해서 일견 명장(名匠)의 수법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그것이 사랑스럽던지 밤에 잘 때도 그것을 손에 들고 자기도 했고, 그뒤 어느 지방을 여행할 때도 꼭 그것만은 몸에 지니고 다녔다. 대개는 여행을 다니면 그때는 간 곳마다 말썽을 부리는 게 세관리(稅官吏)들인데, 모든 서적과 하다 못해 그림엽서 한 장도 그냥 보지 않는 녀석들이건만 나의 귀여운 인장만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내 고향이 그리울 때나 부모형제를 보고 싶을 때는 이 인장을 들고 보고 모시 칠월장을 한번 외워도 보면 속이 시원하였다. 아마도 그 비취인에는 내 향수와 혈맥이 통해 있으리라. - 수필 「연인기」중에서


  짐작컨대 1933년 3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1932년 여름 이후에 육사는 남경에서 보내게 된다. 이 무렵 육사는 김원봉이 남경 교외에서 개교한〈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기로 입학하여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이었다. 육사는 남경의 골동품점에서 비취 도장을 구입하였다. 그 비취 도장에는 모시 칠월장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모시(毛詩)란 후한말의 학자 정현(鄭玄)이 시경《詩經》을 해석한 모전《毛傳》을 말한다. 모시 칠월편은 시경의 빈풍 칠월편을 말하는 것이다. 비취 도장은 사면이 있는 도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면에는 정교한 글자가 쓰여 있었을 것이다.


七月流火 九月授衣 一之日觱發 二之日栗烈
無衣無褐 何以卒歲 三之日于耜 四之日舉趾
同我婦子 饁彼南畝 田畯至喜 


  도장의 면에 이러한 글귀가 작게 새겨져 있다고 하니 얼마나 정교하게 만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안목이 높은 육사가 장인의 숨결이 가득한 비취 인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년 후 이육사는 어머니의 회갑기념 병풍에 빈풍 칠월편을 적어 넣었으니 그가 빈풍편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는 것이 남경에서 구입한 비취 도장에서 연유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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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육사가 그토록 사랑했던 비취인장은 상해에서 S군에게 선물로 주고 돌아오게 된다. 
 

   나는 상해에서 S에게 주고 온 비취인을 S가 생각날 때마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 S가 어디 있는지 십 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없건마는, 그래도 S는 나의 귀여운 인()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태산(天台山)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나는 오늘밤도 이불 속에서 모시 칠월장(毛詩 七月章)이나 한 편 외워보리라. 나의 비취인과 S의 무강(無疆)을 빌면서. - 수필 「연인기」중에서     

  

  육사가 아끼던 비취인장은 지금까지 자취가 묘연하다. 이육사문학관에 비치하고 있는 것은 연인기에 근거하며 실물을 대신한 모조품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S와 육사가 사랑했던 비취인장의 무강(無疆)을 빌어 보는 것이다. 


권오단 / 이육사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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