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의의란도(依依蘭圖)⌟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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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를 치는 법[蘭法]과 인격적 수양(修養)


  의의란도(依依蘭圖)는 이육사 친필의 난초 그림이다. 더 많은 그림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격조가 높아서 많은 경탄을 자아낸다. 예로부터 서화(書畫), 곧 글씨와 그림의 품격은 제작자의 인품과 동일시되었다. 기교를 넘어서서, 작가 내면의 세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격의 향기예술적 가치를 가늠했기 때문이다.

 

  이육사는 시문뿐만 아니라 흥이 나서 붓을 들면 글씨도 능하였고 난초나 매화 절지 따위도 곧잘 그렸었다.”1) 유희삼매(遊戱三昧), 몰입의 경지에서 신명이 나야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무엇보다 독립투사로서 어찌 일상으로 흥이 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어려운 시대일수록 도리어 전인격(全人格)을 걸고 그림이라도 그려 보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의의란도(依依蘭圖)탄생의 비밀이 궁금하다.

 

  이육사는 일찍이 서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사실을 <연인기(戀印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시골 살던때 우리집 사랑방 文匣속에는 항상 몇봉의 印材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우 水山君黎泉君은 그것을 제각기 제를 새겨서 제것을 만들 욕심을 가지고 한바탕씩 법석을치면···(중략)···나와 黎泉은 글씨를 쓰면 水山을 당치못했고 印材는 장래에 水山에게 돌아갈것이 뻔한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씨쓰길 斷念하고 畫家가 되려고 장방에있는 唐畫를 모조리 내놓고 실로 熱心으로 그림을 배워본 일도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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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 이하응, 귀유공자>

 

  17세 때인 1920년에 이육사는 형제들과 함께 신학문에 뜻을 두고 대구로 나갔다. 그때 마침 팔능거사(八能居士)’로 이름난 서병오(徐丙五, 1862~1936)를 찾아가서 아우 수산(水山) 이원일이 글씨를 배울 때, 더불어 그림을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3)  

  서병오는 18세 때 흥선대원군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각별한 부름을 받아 그 재주를 높이 평가받고, 석재(石齋)라는 호도 아울러 받는다. 이때 석재는 운현궁에 머물렀으므로 이하응의 먼 친척이자 스승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묵란과 화론을 접하였을 것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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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 민영익, <월영향무진>, 지본수묵, 59.7 x 32.2cm, 선문대 박물관>

 

  나중에는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망명객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교유(交遊)하기도 했다.5) 이리하여 서병오는 석파란운미란으로 알려진 당대 쌍벽의 묵란화6)를 모두 접하게 된다. 석파란은 이른바 삼전법(三轉法)의 묘()가 뛰어난 그림이고, ‘운미란은 거침없이 유창한 필세를 뽐내는 건란법(建蘭法)의 그림이다. 기실, 민영익의 난초는 전서(篆書)의 획을 상기시키는 장봉획(藏鋒劃)이며 난엽이 거의 직각으로 한번 꺾이는 특수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명말 청초의 화가 도제(道濟, 1642~1707)의 난초와 비슷하다.7)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이육사는 서병오를 통해 묵란화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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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 서병오>

 

 

  난초 그림은 이른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인데, 매란국죽(梅蘭菊竹) 가운데서도 가장 그리기 어렵다. 그림의 형식이 매우 단순하여서 한 붓의 가필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회(心懷)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요체(要諦). 느긋한 마음으로, 그러나 주저 없는 붓놀림으로 단번에 화의(畫意)를 드러내야 한다. 붓을 들기 전에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 살아있다. 백 번 그려서 잘된 한 점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가다듬고 속마음의 응축(凝縮)을 한 붓에 풀어내는 절대적 필획일 것을 요구한다. , 난을 그리는것이 아니라 치는것이어야 한다. 자식을 낳아 기르듯이, 새롭고 개성적인 한 생명이 탄생되게끔 할 마련이다.

 

  치다라는 동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국립국어원 표준어대사전에는 모두 열세 가지의 뜻이 나온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비, 눈 따위가 세차게 뿌리다.”이니, ‘눈보라가 치다’, ‘천둥이 치다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는 붓이나 연필 따위로 점을 찍거나 선이나 그림을 그리다.”이다. 일곱 번째가 가축이나 가금 따위를 기르다.”인데, ‘돼지를 치다’, ‘새끼를 치다’, ‘나무가 가지를 치다’, ‘꿀을 치다’, ‘하숙을 치다와 같은 경우이다. 여기에서 무언가 생산성을 가지면서 개별적 생명 탄생의 의미를 엿보게 되고, 비로소 예술 행위에 가까운 뜻을 떠올리게 된다.

 

  서화(書畫)의 예술성, 혹은 리얼리티는 실물의 모습을 닮게 그리는 데[형사(形似)] 있지 않고, 화가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신사(神似)]에 달려있다. 대상과의 공감, 곧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속일 수 없기 때문에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따른 철저한 관찰이 전제된다. 대상물의 속성을 통찰하고, 이것을 자신의 도덕적, 인격적 목표와 결합되도록 해야 한다. 난초를 그리는 것은 자신의 인격의 함양인 동시에 인생관, 세계관의 표출인 것이다. 묵란화는 이처럼 사실(寫實)과 사의(寫意)가 통합되어 있는, 추상적 화법의 한 형식이다.

 

  사군자 가운데 가장 먼저 아낌을 받은 것은 난초로서, 난의 향기는 왕자향(王者香), 국향(國香) 등으로 불린다. 공자(孔子, BC551~BC479)의란조(猗蘭操)로부터 난의 향기는 왕자향(王者香)’으로 불리게 되고 군자의 덕을 상징하게 되었다. 굴원(屈原, BC343~BC278)의 초사(楚辭)로부터 난초의 향기는 국향(國香)’으로 불리게 되며 난초의 상징은 충절이 되었다. 빼앗긴 송나라의 옛 향기를 그리워한 정사초(鄭思肖, 1241~1318)에게 있어서 난초는 곧 저항정신의 상징이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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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  김정희, <산중멱멱(山中覓覓)>, 지본수묵, 27.623.4cm >

 

  왕희지(王羲之, 307~365)는 거위 목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서법 연구에 몰두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 난 잎의 힘찬 기세에서 자유분방함과 유창함을 배워서 서성(書聖)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9) 

  실로 난초는 잎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꽃을 보는 기쁨보다 클 수 있다. 난초의 꽃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데에 비하여, 난초의 잎은 시원하면서도 애틋한 그 무엇이 있다. 밀도가 적당하면서도 힘이 있다. 일 년 내내 푸르고 작위적인 데가 없는 그 자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양이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10) 이러한 난 잎의 여러 자태를 필법에 응용함으로써 그의 글씨는 아름다운 굴곡과 살아있는 기세를 얻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석파 난권(石坡蘭卷)에 제하는 글에서는 또한 많이 그린 연후에야 가능하니 선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도 없으며 맨손으로 용을 잡을 수도 없다.”라고 충고한다.11) 그의 화론을 한번 귀담아 들어본다. 다음은 추사가 군자문정첩(君子文情帖)에 제()한 글이다.

 

  난을 치는 데는 마땅히 왼쪽으로 치는 한 법식을 먼저 익혀야 한다.

  왼쪽으로 치는 것이 난숙欄熟하게 되면 오른쪽으로 치는 것은 따라가게 된다. 이는 손괘損卦12)의 어려움을 먼저 하고 쉬움을 뒤에 한다는 뜻이다. ...(중략)... 이 봉안鳳眼이니 상안象眼이니 하는 것은 통행하는 규칙이니 이것이 아니면 난을 칠 수가 없다. 비록 이것이 작은 법도法道이기는 하나 지키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나아가서 이보다 큰 법도이겠는가. 이로써 한 줄기의 잎, 한 장의 꽃잎이라도 스스로 속이면 얻을 수 없으며, 또 그것으로써 남을 속일 수도 없다. "열 사람의 눈이 보는 것이고 열 사람의 손이 가리키는 것이니 그 삼엄함이랴!"13)

 

  서자인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당부한다.

 

  난초를 치는 법(난법蘭法)은 역시 예서禮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법은 그리는 법식(화법畵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趙熙龍(1789~1866)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는 그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중략)... 난초를 그리는 것은 서너 장의 종이를 지나칠 수 없다. 신기神氣가 서로 모이고(정신이 통일되고) 경우(분위기)가 무르녹아야 하는 것은 서화書畵가 모두 똑같으나 난초를 치는 데는 더욱 심하거늘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느냐.14) 

 

 

■권기윤 /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1. 손병희 엮음, 광야에서 부르리라, 이육사문학관, 2004. 70

2. 손병희 편저, 이육사의 문학, 이육사문학관, 2017. 209쪽.  

3. 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 창비, 2017. 21쪽.           

4. 이인숙,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6) 묵란화 연구, 嶺南學26, 2014. 401.

5. 민영익은 자신과 소년시절부터 교유하며 알고 지내던 석재 서병오가 중국에 와서 자신과 함께 기거하며 먹을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충석유방(忠石流芳)’의 명()이 새겨진 단계(丹溪) 벼루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벼루는 민영익이 천심죽재(千尋竹齋)에서 보배로 즐기던 것으로 포화(蒲華, 1834~1911)가 명()하고 서신수(徐新周, 1853~1925)사 각()했다. 심후섭, 팔능거사 석재 서병오, 민속원, 2019. 93~95

6. 묵란화묵란도보다 상위 개념이다. 묵란화는 난초 그림의 일반적인 명칭이고, 개별적인 난초 그림은 묵란도라 칭한다

7. 정양모 책임감수, 한국의 미 ⑱ 『花鳥四君子, 중앙일보사, 1991. 181.

8. 이어령 책임편찬, 난초, 종이나라, 2006. 011~015.

9. 왕희지는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 행서, 초서의 실용 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켰다. 그는 한 글자를 쓰더라도 여러 서체를 함께 사용해 변화를 주었으며, 글자의 변화는 작품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했고, 글을 쓸 때는 감성을 따라 쓰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 완벽한 형식미를 구사했다 

10. 이어령 책임편찬, 같은 책 062쪽.

11. 김정희 저, 최완수 역, 같은 책 364쪽.            

12. 주역周易15 손괘損卦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면 곧 이익이 되고, 아래를 가져다가 위에 보태면 곧 손해가 된다.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이 그 혜택을 베풀어 아래에 미치게 되면 곧 이익이 되고, 그 아래의 것을 가져다가 스스로 살찌면 곧 손해가 된다.(損上而益於下 則爲益. 取下而益於上 則爲損. 在人上者 施其澤以及下 則爲益也. 取其下而自厚 則爲損也.)”  김정희 저, 최완수 역, 추사집, 2014. 373. 

13. 김정희 저, 최완수 역, 추사집, 2014. 371,372.

14. 김정희 저, 최완수 역, 같은 책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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