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시대,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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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이육사문학축전 난상토론]

 

마스크 시대,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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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이병일 시인

 안현미 시인

 이원규 시인

 신철규 시인

 

 

사회자 :

이육사문학관 김균탁 학예과장입니다.

17회 이육사 문학축전 이육사 문학학교 <마스크 시대 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다섯 분의 시인을 모시고 현재의 코로나 시대를 시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담론을 나눠보겠습니다.

오늘 초청 시인으로는 손진은 시인, 이원규 시인, 안현미 시인, 신철규 시인, 이병일 시인입니다. 대담을 이끌어주실 손진은 시인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손진은 시인 : 

안녕하세요. 손진은 입니다. 오늘 좋은 분들과 문학 담론을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육사 선생님도 청포도라는 시에서 모시수건에 포도가 흘러넘치는 듯 이 생태 시대에 가장 적합한, 이웃에게 따뜻하게, 못 가진 자들에게 배려하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마 마스크 시대에 나아갈 방향 중에 하나가 육사 선생의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들은 범접해 보지는 못하겠지만 또 이런 아픈 시대가 왔어요.

어떤 비평가에 의하면 리얼리즘 시대가 끝나고 모더니즘 시대가 끝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끝나고 이제 정말 COVID 19시대가 왔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COVID 19가 지나면 다른 것이 또 올 것이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지금 전부 마스크를 쓰고 앉아계시잖아요.

우리와 여러분이 도둑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데도 얼굴을 가리고 맞이해야 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옛날에는 적이 눈에 보였지만 지금은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좋은 분들, 특별히 젊으신 분들, 제가 나이가 조금 더 먹은 것 같아요. 그래서 먼저 마이크를 잡았는데 부족하지만 여러분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 문예지에 발표된 시 가운데 장옥관 시인의 안되겠지예라는 제목의 시를 봤어요. 무슨 내용이냐 하면, 한 달 동안 손님 하나 오지 않은 가게였어요. 그 가게에 여전히 식객들은 있어서 돈을 천 원씩 얻으러 다니는 분이 와서 눈치를 살피더니 나가면서 오늘은 안되겠지예?’ 라고 하며 나가는 아픈 현실을 노래하는 시였습니다. 거지같은 분들도 지금은 안되겠지예?’라고 말해야 되는 이 아픈 시대에 우리가 이런 문학 담론을 나누는 것에 대해 한편으론 가슴이 아프고 뭉클하기도 합니다. 우리 네 분 중에 신철규 시인이나 이병일 시인이 COVID 19에 대해 쓰신 시가 있어서 봤는데요. 네 분 시인들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 편하게 말씀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철규 시인부터 마이크 잡아 주시겠어요?

 

신철규 시인 :

. 정말 이렇게 귀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철규라고 합니다. 문학관에 와서 이육사 시인에 대해서 시집을 보고 또 산문들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고등학교 수능시험에서 봤던 것과는 다름을 느꼈습니다. 젊음도 있었고, 청춘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포기한 것은 국가적인 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또는 우리 민중에 대한 아픔을 본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을 담고 있어서 이곳에 와보고 싶었습니다. 이육사 생가가 실제로 이육사 문학관 아래에 있었다는 얘기를 이위발 국장님께 들었습니다.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뭔가를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COVID 19 관련해서 시를 꼭 쓰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우리의 소통 방식이 그 이전과 너무 달라졌고 뭔가 차단되어 있다는 느낌들이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을까? 극단적인 폐쇄감과 고립감들의 마음들을 시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전망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의료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끼리의 만남과 그 눈빛의 소통이 소중함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시로 어떻게 표현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중에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야기 좀 듣고 같이 토론했으면 좋겠습니다.


손진은 시인 :

네, 이병일 시인 마이크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병일 시인 :

저도 이육사 문학관은 처음인데요. 저희는 기억에 남는 게 국어 시간에 이육사의 시를 암송하는 기억이 가장 많이 남아있고, 또한 이육사 시인하면 현실 인식이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와중에 지금 이 시대는 불통의 시대일 수도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또 소통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해마다 한두 번 감기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 이후로 감기 증상은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인간이 환경에 적응할 것인가 라는 논제를 오래 생각해봤는데요. 늘 환경이 안 좋으면 나무들 잎이 시들고 뿌리가 말라갑니다. 그것을 보고 한 때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를 썼죠.

코로나 시대에는 집에만 있으면 굉장히 답답하고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우리와 떨어져 있는 생명들이 같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코로나 이전에는 세심하게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힘은 들겠지만 자연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많아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손진은 시인 :

, 자연스럽게 안현미 시인 이어갑니다.

 

안현미 시인 :

저는 카만카차 19’라는 시를 여름호에 발표했습니다. ‘루이스 세풀베다라는 소설가가 코로나 때문에 사망을 한 사실이 있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그 작가가 코로나 때문에 사망해서 그걸 계기로 코로나에 관한 시를 썼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코로나가 오면서 전 지구가 마스크를 쓰는데, 사실은 인간만이 쓰는 것 같기는 해요. 코로나 때문에 죽은 개미도, 코로나 때문에 죽은 나무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시점에서 지구라는 곳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되는지 그런 것들을 저 자신이 성찰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직 답은 못 얻었고요. 마스크 시대 힐링이 되는 시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힐링을 넘어선 어떤 것이 필요한 시대가 되지 않았나. 인간과 지구가 존재라는 공간에서 깊이 있게 성찰해야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스크 안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고민해야 되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진은 시인 :

이원규 시인은 지리산에 계시니까 깊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원규 시인 :

반갑습니다. 이원규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이 일출을 보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출발해서 올라 왔습니다. 칠곡 지나다가 각산리라고 하는 아주 작은 조그만 절이 있습니다. 천년고찰인데 그냥 일반 토굴 같은 할머니 스님만 계시는 거기에 천년된 은행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검색해보시면 말하는 은행나무라고 나옵니다. 그 나무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그날 밤에 기도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 말을 해준다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때론 딸을 주기도 하고 아들을 주기도 한다는데요. 그 나무를 제가 올해 몇 번을 찾아갔어요. 오월에도 가고, 칠월에도 갔습니다. 오늘도 각산리를 지나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제가 20년 전에 낙동강 오염 때문에 위기라고 해서 낙동강을 이맘 때 걸었습니다. 안현미 시인의 고향인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출발해서 을숙도까지 29일 동안 걸어서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조금 전에 다시 가봤거든요. 저 위에 공사를 하는지 강물이 좀 흐리더라고요. 20년 전엔 물고기가 다 죽어있었어요. 강원도 탄광에서 흘러나온 물과 봉화 석포의 아연공장에서 나오는 물이 섞여 낙동강이 오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강원도 탄광 오염수 문제는 많이 해결 됐습니다. 붉게 철분기가 흐르던 물엔 물고기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언론에서도 알려졌지만 아연공장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오늘 보니까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강 일부에는 녹색 복면을 쓴 녹조현상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20년 전에도 강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어요. 강은 이미 푸른 녹조라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우린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떠는 거예요. 우리에게 위기가 오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년된 신목 노거수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단박에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면서 예천 느티나무 두 그루도 뵙고 왔는데요. 한 그루는 약 300, 한 그루는 은풍초등학교에 있는 700년 된 나무를 보고 왔습니다. 정말로 오랫동안 되짚어 질문해보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손진은 시인 :

방금 이원규 시인 말대로 인간이 우리 주변에 있는 하늘의 별이나 나무나 강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대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그들과 공생하지 못하고 우주와 하나의 흐름이 되지 못하고 살아 왔기 때문에 하늘이 내린, 혹은 자연이 내린 그 벌로서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시 멈추고 우리 전체를 돌아봐야 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아픔이 저희들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이육사 시인께서 1935년도 신조선지에 발표한 황혼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월의 골방에 계셨던 것 같아요. 아마 어두운 골방이겠죠. 그런데 저녁에 황혼이 비치면 그 모습을 보면서 황혼이 모든 세계를 다 비추고 있잖아요. 그래서 황혼아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그러니까 황혼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것에 이육사의 시적 주체의 입술이 그 속에 들어가요. 들어가면 자기는 어떤 것을 위로 하고 싶은가 하면 열 두 성좌의 반짝이는 별 그리고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또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또 고비사막을 걷는 낙타 탄 행상에게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달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육사 시인이야 말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하나의 형제나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금 이원규 시인의 말을 들으면서 이 우주에 대한 책임, 자연에 대한 책임, 짧게 말하면 식탁에 올라오는 농산물에 대한 책임, 이런 것들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자기 음풍농월을 즐기거나 그런 이야기 할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개인의 심리만을 다루었던 이상 같은 시인들도 일제 당시 현실의 비참함을 같이 다루었거든요. 이육사 시인이 우주의 모든 것을 자기 품 안에서 자기 입술 속에서 입 맞추고자 했고 껴안고자 했던 시적 출발부터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개인적 주체와 공동체적 주체, 즉 겹 주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병일 시인도 이야기했지만 산에 간다.”고 했는데 이병일 시인의 시 피자두라는 시가 있습니다. 정말 피처럼 느껴지는데 피가 아닌 우주의 기운, 천국도 박혀 있고, 하늘의 별도 박혀 있는 그 자두의 모습을 피자두의 모습으로 명명하는 모습을 보고 이병일 시인도 코로나 시대를 예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내면만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자기 내면과 함께 이 나라 그리고 평화가 무너지는 이 환경위기 생태를 노래해야 되는 시기가 오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번째 주제를 던져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원규 시인

  거기에 대해서 저도 제정신 못 차리고 있어서요. (웃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위기가 문화 예술인에게는 도리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성찰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만의 세계로 독주하는, 앞 보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현란한 수사까지 동원해서 그 재미를 톡톡히 봐왔던 시대가 있었어요. 특히 미래파라고 불렸던 문학 판에서 잘 모릅니다마는 그 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생존의 존재에 있는 것도 예측불가 때문에 불안한데다가 문학예술적인 작품이 더 불안하게 해준다? 이것은 당분간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술인들은 어차피 처음부터 비대면이었어요. 비대면으로 깊이 침잠할 때. 이육사 시인도 골방에 왜 들어갔겠습니까? 광장에 나와서 전투적으로 싸우시고 감옥에 끌려 가기도 하고 스스로 면벽하듯이 골방에 들어가기도 하셨는데 지금은 전 세계가 골방에서 강제 감옥살이 하는 셈입니다. 누구든지 심리적으로 밖에서 일을 하든 안 하든. 저는 이 기회를 도리어 인류사의 지혜를 모아내는 자연의 임무로서 생각을 해봐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구의 자연인 중에 하나라는 것을 산에 가보면 알죠. 자연 속의 겨우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지혜의 총아들이 잘 나타나는 개성적인 시대가 돼서 시를 읽는 독자는 많이 줄었지만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금방은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기미가 보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손진은 시인

  이병일 시인이 받아주시겠어요?

 

 이병일 시인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가려운 건 옻나무인줄 알았습니다. 제가 시골 태생이다 보니 덜 익은 호두껍데기를 잘못 까면 호두나무에서도 독이 오르고, 시월 달에 은행을 주워서 그것을 손으로 잘못 만지면 옻독이 오릅니다. 큰일 납니다 가려움증에 걸려서. 그런데 올봄에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박상순 시인이 발표한 철문으로 만든 얼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철면피를 얘기하는 시입니다. 시를 읽고 나서 제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오는 사람들 때문에 유채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곳을 갈아엎어버리는 뉴스를 봤습니다. 지구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것은 인간이라는 게 확실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해주었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괴롭히는 것을 좋아할까라는 이런 논제를 갖게 됐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런 것들은 관심이 아니라 집요하게 긁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려운 곳을 긁을 때는 쾌감도 있겠지만 고통도 동시에 따라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대면으로 일 년 동안 생활해왔는데요.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코로나 역시 극복이 아니라 혐오감을 일단 없애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돌팔매를 합니다. 돌을 던지면 상처 입은 사람은 돌팔매를 맞은 사람이 아니라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까 손진은 시인께서 하나의 공동체를 얘기 하셨는데 공동체라는 것을 저는 나눔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시에서 어떻게 생각을 나눌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의식을 가진 시가 쓰여 져야만 그 공동체의 문제를 환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현미 시인

  붙여서 얘기하자면 비대면이라는 것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옛날 조상들이나 어른들은 한 번 결혼하거나 시집가면 평생을 비대면으로 친정을 그리워하고 이랬잖아요. 그런데 그걸 그때는 비대면이라고 하지 않았죠.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금의 코로나 19로 인해서 주어진 환경이 옛날의 우리 정서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평생을 한 번 볼까말까 했지만 그래도 애틋했던 그런 정서에 우리를 데려가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고요.

  비대면 때문에 사실은 은밀하게 인터넷을 통해 멀리 있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들,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만날 수 있다는 건 하나의 지구가 공동체로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또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지점에 대해서 시인들이 고민하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지구라는 공동체를 잘 보존하고 물려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 같긴 하네요.

 

  신철규 시인

  앞의 분들이 중요한 얘기를 다 하신 것 같아요. 우선은 이병일 시인께서는 자연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 또는 발견을 할 수 있는 시대, 그래서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시대라고 말씀해주신 것 같고.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인간 전체의 또는 문명 전체의 진보가 가능한가, 과연 그것을 우리가 이뤄냈는가, 이 체계가 나쁘지 않다고 믿었던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대표되는 착취,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으로서의 자연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야 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안현미 시인께서는 개인의 힐링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힐링처럼 지구의 힐링이라고 하셨을 때, 우리의 심리적인 만족만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이용하는 소통방식에 대한 질문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생태와 관련돼서 저는 잘 몰라서 그렇긴 하지만 예전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위험의 외주화, 이런 말도 나왔지만 위험이 한 쪽으로 쏠려있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다보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 문인들을 만났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생계 자체가 불투명해져 위험성에 노출된 문인을 봤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돌파구가 가능했다면 이 돌파구 없음을 막을 수 있는 안전망에 대한 그런 것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을 새롭게 만들어줄 순 없어도 어두운 곳을 찾아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그런 시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는, 구원을 요청하는 것 자체도 실례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그렇게 안 보이는 곳으로 문학은 좀 더 들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손진은 시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어떤 부활절이라는 시에서 코로나는 자기들끼리 개인으로 살지 않기로 했다는 거죠. 바이러스와 이런 것들은 사람들 속으로 혹은 동물들 속으로 들어가서 살기로 했기 때문에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신이 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이브스루를 코로나 하고 둘이서 고해성사하는 곳으로 그렇게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안현미 시인도 이야기했지만 옛날에 이곳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산골 같은 곳에 시집을 오면 정말 마스크를 안 써도 그야말로 혼자 있어야 되는 그런 시절에 대해 한 번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무산 시인은 정지의 힘이라는 시에서 말했지만 정말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야 될 시기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요즘 시골이라고 해서 완전히 안전한가? 그렇지는 또 않은 것 같아요. 여기 당장 안동에 계시는 분들도 그렇지만 농산물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과나 배를 재배하기 위하여 쇠 파이프에 묶고 쇠줄에 감고 이렇게 해서 키워내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정작 자기 자녀를 농산물 자녀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낳아야 되는 엄마는 생식만을 위한 존재가 되어가지고 애 머리통만한 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계속 시달리는 거예요.

  배가 불뚝하게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요. 식탁에 놓일 땐 사람들이 큰 것만 찾잖아요. 그게 사실은 영양제라든지 인공의 것들을 가미한 것이거든요. 가장 순수해야할 자연에 마저도 인간들이 벌써 이런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농촌도 산과 밭도 사실 오염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할 시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코로나 시대가 참 아프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돌아서서 인류 역사를, 우리를 한 번 생각해봐야 될 시기가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하늘이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게 아닌가, 더 큰 위기를 맞이하기 전에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는 이런 아픈 문제가 문학 하는 사람에게 보여 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한 쪽 가슴으로는 자기를 살아야 되지만, 한 쪽 가슴으로는 자기 바깥의 공동체와 우주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개인 창작과 관련해서 코로나시대, 혹은 코로나 시대를 넘어서는 그런 자신의 모습들 그런 것들이 있으시면 이제 조금씩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신철규 시인 좋은 작품 많이 있으시잖아요. 코로나와 관련 없이도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편안하게.

 

  신철규 시인

  주제가 마스크 시대, 또는 코로나를 살아가는, 또 코로나 이후의 문학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되는데 실제로 시인들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에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기원적인 질문들인 왜 우리는 소통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만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민감하게 누구나 다 고민하고 있잖아요. 이것을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 저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은 불안 자체가 수치화 되어 있죠. 매일 발표되는 수치 하나에 따라서 오늘의 기분이, 오늘의 상태들이 변화되는. 자기가 단절되고 싶어도 단절될 수 없는 이상한 경계에 서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쓰는 시는 최근에는 사회 현장에 나가서 쓰는 시는 아니지만 그런 관계에 대한 고민들이죠. 아까 말이 나왔듯 예전에는 안동에 어떤 마을로 시집 가버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생전에 두어 번이나 겨우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사연 때문에 애틋함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시대에 애틋함을 얘기하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든지 소통에 대한 열망들 이런 것들을 제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제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거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병일 시인

  손진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과일 얘기도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저는 과일이라면 큰 것이 좋은 줄 알았는데 큰 것들에게는 인공적으로 주사를 놓고 돌연변이를 만든다고 얘기를 하니 그런 과일을 먹으면 해롭겠죠.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은 전북 진안인데요. 여기는 일교차가 15도 이상이 난대요. 그래서 사실은 장수보다 사과나무가 잘 적응을 한다고 하네요. 저도 몰랐는데 모든 과일들이 딴딴해요. 그 원인이 일교차에 있대요. 이것도 사실은 환경공부를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코로나 오기 전에 더 심한 게 사실은 아프리카 돼지열병이었잖아요. 막무가내로 돼지들이 죽어나갔는데요. 생명을 막무가내로 죽이는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구제역 같은 경우는 너무 끔찍했잖아요. 저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 어머니가 돼지새끼를 길렀어요. 길러서 새끼를 받으면 제 기저귀로 닦고 다라이에 넣어놓고 열 두 마리 정도 모이면 꿀꿀꿀 이런 소리가 났거든요. 그런 맑은 정서는 지금은 못 봅니다. 왜냐하면 그런 환경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생산성으로 너무 기대서 그런 정서는 옛날에나 맛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사실 요즘 시 쓰면서 저는 생태시 쓰는 게 가장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가 환경에 어떻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이런 지점을 통해서 저 나름대로 일기 비슷한 글이지만 시가 성공이 아닌 실패를 꿈꾸기 때문에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사고에 민감합니다. 아까 신철규 시인이 말한 것처럼 오늘 코로나 확진자가 300명이다, 이러면 우리 내면에 불안 심리를 주는데요. 이런 불안 심리를 가지면서도 조금 힐링이 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sns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코로나 시대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같은 sns를 통해 비대면으로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현미 시인

  저는 평소에도 다작을 하는 시인은 아닌데요. 그런데도 절제할 수 있는데 절제하지 않고 써왔다는 생각도 좀 들어요. 제 시를 쓰면서 이 단어는 좀 짧게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보다는 더. 그리고 종이도 아껴야 되니까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옛날에는 회식도 많이 하고 외식도 하곤 했는데 할 수가 없어서 집에서 요리를 해요. 맛은 없어요. (웃음) 맛은 없는데 요리를 하면서 재미있어진 게 있어요.

  어떤 가난한 시인이 배추 두 통을 선물해줬어요. 해남에 있는 엄마가 농사지은 배추라고 하는데 이 배추 두 통이 저한테는 큰 화두인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서 먹어야 되지? 처음에는 그냥 씻어서 배추쌈을 해서 먹었어요. 그래도 반통이 남았어요. 그래서 배춧국을 끓였거든요? 배춧국을 끓여도 한 통 반이 남아있어요. 아직도 집에 한 통이 남아있어요. 그래서 배추 생채도 해먹고.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쉽게 돈 주고 사먹고 맛없다, 맛있다, 맛집이다. 우르르 몰려다녔었는데 비록 제가 해서 맛은 없지만 이 배추로 오늘은 어떻게 해먹고, 가난하지만 이 배추를 나한테 준 그 시인의 마음이 너무 좋다, 그런데 그 마음은 왜 시가 안 될까? 그렇라면 시가 아닌 것을 시인 것처럼 발표하지 말자,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게 시가 될 때까지는 또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멈춰야 될 땐 멈춰야 하는데 우린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빠르게 돈 주고 사먹고 그런 식으로 소비해왔던 것을 다시 멈추고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도 그렇게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철규 시인

  안현미 시인께서 잘 말씀해 줘서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대는 낭비의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낭비들이 관계의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관계의 어떤 횟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결국 언어 하고도 연결되는데 어떤 언어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들을 시인들은 가졌을 것 같고, 저도 시를 길게 쓰는 편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짧게 쓸 수 있을까, 하나의 단어가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을 획득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절차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것과의 만남에서 항상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이 단절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까지의 절차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자기 몸으로 느끼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문학에 담아낼 수도 있고 시가 또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원규 시인

  저는 지리산에 내려 간지가 23년쯤 되었는데요. 그때는 IMF라고 하는 경제 질서가 세계와문제로 돌출된 거죠, 제가 언론사에 있었는데 제일 착한 사람이 잘리더라고요. 1 순위였죠. 지금도 그래요. 모든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착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잘려요. 위기가 오면 위기 대체 능력이 없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불행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걸 보고 도시에서 인간관계는 나 같은 사람들은 실패자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자연 생태계적으로 좋은 지리산을 선택했었는데 후회해 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요즘은 제가 사진을 10년째 독학하고 있는데요. 제 문자에 대한 반성으로 사진을 하게 된 겁니다. 월간 지에 10년 째 글을 연재하는데 사진에 대한 무시를 엄청나게 많이 당했습니다. 사진 전공자, 사진 기자, 사진작가들에게. 혼자 열 받아서 독학으로라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붓을 들고 그리는 것은 사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사진기라면 디지털 시대가 와서 독학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독학을 시작하면서 7년 째 별을 찍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밤이 없습니다. 밤이 없으니깐 별이 안 보입니다. 대한민국도 늘 대낮입니다. 안동시내에서도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서울서도 당연하고, 면단위 가도 안보입니다. 쓸 데 없이 가로등을 많이 켜놓았어요. 시골가면 보이느냐? 안보입니다. 그렇다면 잠을 못 잔다는 이야기죠? 식물도, 사람들도 나도 그렇습니다. 지구촌의 사람들 모두가 쉴 때 쉴 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도 별이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밤이 더 밝아지기 전에 기록을 해야겠다 해서 7년 째 찍고 있어요. 남한 쪽에는 거의 다 찍어서 봉화든 거창이든 태백이든 별이 보일만한 곳은 가서 기록을 해왔습니다. 시 한편이 사진 한 장과 대등할 수 있을까? 그게 저의 고민이었기 때문에 이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밀어 붙여 왔는데 사진 찍으러 가서 시를 쓸 때가 있습니다.

  사진은 별 하나 찍으려면 3년 같은 자리에 계속 가야 한 장 정도 찍을 수 있습니다. 별을 맞출 수 있는 확률을 보면서 제가 써온 글을 함부로 썼다는 생각, 문자를 낭비했다는 반성이기도 해요. 어떨 때는 시를 하루에 10편씩 쓴 날도 있고, 3년 동안 한편도 못 쓴 날도 있었습니다. 요즘 오래된 별들은 알아봤더니 우리 어머니 태어나기 전에 태어났어요. 100 광년 전에 출발한 거예요. 돌아가신지 20년 되었는데 어머니 태어나기 전 별빛을 이제 제가 찍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남해에 사는 한 할머니가 백일장에 참가해서 제출한 작품의 제목이 연필지팡이예요. 죽을 때 까지 이런 글 쓴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내용이 뭐냐면 평생 밭에서 일하면서 허리가 꼬부라져서 지팡이 짚다가 지팡이도 안 되서 유모차를 밀다가 근데 연필 덕분에 주소 한 개만 대면 자식들 집에 갈 수 있어요. 나는 연필지팡이이 제목보고 평생 이 한편만 써도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예요. 시를 오래 고민 했다고 했는데 도리어 이 간절함, 한글을 몰랐던 사람들이 문자를 알게 되서 이런 진정성을 이 기회에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손진은 시인

  시인들의 시 창작 의식 속엔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안현미 시인은 시작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언어를 아끼고 이제는 짧게 써야겠다. 이게 우주에 대한 도리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거 같고, 이병일 시인은 현대 문명이나 코로나19 와는 정 반대의 지점 속으로 가서 고향에서부터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고, 이원규 시인은 글 쓰는 것도 글 쓰는 것이지만 언어 이전의 근원, 별빛 속으로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의 별을 내가 찍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마스크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의 친근한 인간을 제외한 나무들, 자연들, 그리고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글자 때문에 버림받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신철규 시인은 우리가 낭비의 시대에 살아갈 것이 아니라 절차나 과정 까지 신경 써야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최근에 안상학 시인에게 시집을 선물 받았는데 재미있게 읽은 두 가지 중 하나는 생전에 봉화 출신 전우익 선생님은 안동간고등어에 구더기가 박혀 있는데 그걸 떼어내시고 부엌에서 고등어를 구워서 주는데 전우익 선생 자신은 먹고 있는데 옆에 있는 시인들은 못 먹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다운 안동과 봉화의 매력입니까? 그리고 안동식혜 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셔서 큰집에서 먹던 식혜가 그렇게 그립다는 거예요. 이건 정말 마스크 시대에 나와야 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고요. 또 안상학 시인은 고비의 시간이라는 말을 했어요. 앞으로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모레도 아니고 내일 이라고 말하는 원초적인 행위까지 이 시집은 그렇게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재밌다 어떻게 코로나 시대를 예견했을까이런 생각도 개인적으로 해봤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도 마스크 시대 행위의 출발점이자 시적 출발점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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