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에세이

소문의 해일 속, 진실이라는 이름의 보물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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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세상과 무서운 책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무서운 게임이 있다. 마치 완벽하지 않은 공포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왔을 때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는 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게임은 공포 게임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We Become What We Behold>라는 캐나다의 플래시 게임이다. 언론의 영향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람들 간 관계 형성과 갈등을 보여주는 게임이다. 내가 직접 플레이해 본 것은 아니지만, 중학생 때 다른 사람이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다. 그 나이의 나에게 이 게임의 스토리와 결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징그럽게 꾸물거리다가 소리를 지르고 피를 흘리는 게임 속 캐릭터들은 아직도 머리가 멍해질 만큼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들으며 언론의 개념을 익히고 매체의 활용과 올바른 사용법을 겨우 배우고 있던 내게 언론의 검은 내면과 대중들의 빨간 증오를 알게 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6년 뒤 이꽃님 작가의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으며 그때 보았던 게임 속 장면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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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학교 출판사
 

 처음엔 그저 학교폭력을 다룬 청소년 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눈에 띄는 강렬한 책 제목부터 표지에 그려진 두 명의 여학생까지 책의 모든 요소가 학교폭력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학교폭력을 말하고 있지 않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물들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무엇인지, 인물 간 관계에서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 독자가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계속해서 파헤치게끔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연속적인 물음표를 띄웠고 답을 찾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명씩 의심하고 추궁하며 사건과 사건들을 연결해야만 했다.

 

 


 청소년들의 세계 속 진실

 

 저자는 왜 진실을 말하려 했을까? 그리고 왜 진실이라는 키워드를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와 결합한 것일까? <죽이고 싶은 아이>는 청소년 소설에 해당한다. 책 속 인물들의 말은 실제 청소년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로, 청소년들의 특징을 살려 저자가 은어, 비속어 등을 적절히 섞어 넣었다. 사용하는 물건이나 이용 시설, 관계나 집단이 형성되는 체계까지도 그들의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청소년들을 겨냥한 책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왜 하필 청소년에 관심을 둔 것일까? <죽이고 싶은 아이>의 저자 이꽃님은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메두사의 후예>로 등단하였고,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로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은유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생겨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인공 은유15살의 중학생이다. 그의 다른 작품인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에서도 은재’, ‘형수’, ‘우영모두 15살 중학생으로 등장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주연서은17살 고등학생이다. 저자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중고등학생의 청소년이다. 영글지 않은 나이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대화하고, 자신의 심리를 털어놓고, 사건을 설명하며,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저자는 늘 작가의 말에서 중심이 되어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 안에 저자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처음엔 은유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어요. 기적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요. 나중에서야 그게 진짜라는 걸 알게 되지요.

-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작가의 말

 

 나는 수많은 은재와 우영이의 삶에 아직 오지 않은 행운들이 가득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삶을 꼭 부여잡고 놓지 않은 많은 이들의 삶 역시 그럴 것이다.

-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작가의 말

 

 생각해 보면 주연이는 참 불쌍한 아이다. 엄마 아빠마저도 주연이를 믿어 주지 않았으니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던 서은이마저 주연이를 친구로 생각한 적 없다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이 땅에 주연이를 믿어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셈이다.

- <죽이고 싶은 아이>, 작가의 말


 

 인물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청소년이라는 점을 본다면 저자가 왜 청소년에 주목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저자는 은유’, ‘은재’, ‘주연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름을 불러준다. 이를 통해 그들이 다투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단계를 세상에 드러낸다. 저자는 어른들이 놓치고 있는 청소년들의 성장 과정을 포착하여 알려주고자 한다. 이것은 사회의 어느 한 단면을 보여주는 저자만의 고유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한부모 가정의 자녀를 보여주며 가족의 이해와 사랑을 가르쳐주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이와 친구들에게서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의미를 상기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에서는 가짜와 소문 속에 버둥거리고 관계를 맺어가며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보여주고 그 안에 숨은 진실에 주목한다. 결국 저자는 책에서 겉으로는 청소년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는 사회의 단면과 우리가 깨우쳐야 할 중요한 가치를 환기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세계를 통해 정말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실을 알려준다.



 

 ‘post-truth’ 시대 속 주연과 서은

 

 앞서 말했듯 이 책은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진실과 믿음 아래에는 언론이 존재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에는 피디가 등장한다. 언론으로 대표되는 이 피디는 학생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그 인터뷰가 주연의 이야기 사이에 단독으로 삽입되어 있고, 실제 인터뷰를 하는 인물의 대화만을 그대로 넣었으며 다른 폰트로 구분되어 있다. 주연과 서은의 이야기와 구분되어야 할 만큼 이 책에선 피디의 인터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피디는 어떠한 판단이나 분별이 없이 주연과 서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라면 곧장 달려가서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들도 그에게 , 몰라요. 저는 할 말 없어요. , 진짜 왜 이래요? 모른다고 했잖아요. 짜증 나게 진짜.”(78), “지금 이거 누구 허락 받고 하시는 거예요? 아니, 방송국 입장은 알겠는데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애들 생각은 왜 안 하세요?”(149), “나 참. 또 취잰지 뭔지 하러 오셨수?”(155)라며 한마디씩 하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은 피디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피디에게 무언가 말을 걸거나 피디의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만 나올 뿐이다. 피디도 분명 그 대화에 참여하고 있지만 피디는 무얼 말하고 있는지 독자는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여 가십거리들을 생산해 내고는 그 뒤로 숨어버리는 언론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결국 이 책의 스토리 속 쟁점인 주연이 범인이다.’라는 것은 언론이 부풀려서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에 휘둘리는 대중들은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을 그 자리에서 믿어버리고 신뢰가 그대로 정착되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사건을 바라본다. 비로소 ‘post-truth(탈진실)’의 시대의 모습이 이 책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post-truth’2년 전 우연히 발견한 단어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 채 기억만 해두고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 뜻을 찾아보았는데,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공공의 의견을 형성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사실이 감정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호소보다 덜 영향력이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 형용사다. 2년이 지난 지금,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다가 ‘post-truth’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지식이나 정보가 객관적인 진실보다 맥락적이고 상황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는 이 단어의 뜻이 곧 이 책을 설명하고 있다. <죽이고 싶은 아이>‘post-truth’의 정의 그 자체를 보여준다.

 매체 기술의 발전은 정보의 생산과 수용뿐만 아니라, 공유, 재구성의 영역까지 침투하여 그 속도를 가속화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그대로 존재하고 전달되기보다는 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태초와 다르게 가공된다. 이때 post-truth 시대의 특성과 이 기술 발전이 맞물려 정보는 진실이 아님에도 진실처럼 믿어지거나, 가짜 뉴스가 무수하게 생성되곤 한다. post-truth 시대에서 우리는 진실을 조작하고 죄의식을 숨긴다. 이는 곧 책의 마지막 차례인 ‘40. 목격자의 내용과 일치한다.


 

 진짜 실수였어요. 정말이에요. 그게 재수 없게 가방에 맞아서 떨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게 또 하필이면 그 밑에 있던 박서은을 맞혔을 줄은…….

 미치는 줄 알았어요. 잠도 못 자겠더라고요. 설마 잘못되진 않았겠지, 아닐 거야.

 지주연이 범인으로 지목됐을 때,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정말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금방이라도 경찰이 절 찾아올 줄 알았어요. 지주연은 범인이 아니니까.

 근데 티비에서 인터넷에서 전부 지주연이 살인마라고 하더라고요. 지주연은 끔찍한 애라고.

 생각해 보세요. 전 정말 단순히 실수를 했을 뿐이지만 지주연은 오랫동안 박서은을 괴롭혔잖아요. 지주연이 박서은을 그렇게 괴롭혔다면 지주연이 벌을 받는 게 정의인 거잖아요. , 맞아요. 전 정의를 위해서 거짓말을 조금 했을 뿐이라고요.

- <죽이고 싶은 아이>, 194-195

 


 죄의식을 숨기기 위해 목격자는 창밖에 있던 서은을 벽돌로 맞혀 죽였다는 자신의 실수를 꽁꽁 감추고, 주연의 탓으로 돌리며 거짓말을 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잠도 못 잘만큼 죄책감을 당연히 느끼고 있긴 하지만, 그 죄책감이 몰려오는 것조차 두려워 남의 탓으로 돌린다. 목격자는 진실을 조작하고, 진실을 조작하기 위한 이유를 만들었다. 주연이 서은을 오랫동안 괴롭혔다는 것을 탓하며 자신의 잘못은 실수라고만 반복해서 말한다. 그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할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서 거짓말을 한다.

 또한 post-truth 시대에서 사람들은 정보의 진실 여부를 찾거나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개인적 신념에 호소하는 정보들을 더욱 찾아보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책의 전체 내용에서 등장하는 불특정의 사람들이 지닌 태도와 일치한다. 그들은 주연에 대한 나쁜 인식과 소문을 들리는 그대로 믿으며, 그 믿음을 주연이 범인이다.’와 곧바로 연결한다. 정보의 객관성이나 사실성을 판단하지 않고 그 정보의 내용이 자신이 가진 세계관, 가치관과 부합하는지만을 따져가며 우선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는 가짜 뉴스를 만들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확산된다. 목격자의 거짓 진술,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주연은 범인으로 낙인이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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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와 언론 사이 교사는 무엇을 하는가

 

 <죽이고 싶은 아이>에는 어른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특히 교사의 유형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이 책에서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주연과 서은의 담임 선생님은 서은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던 것, 주연이 서은에게 집착을 하며 멋대로 굴었던 것 모두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고 실토한다. 중학교 시절 주연의 학원 선생님은 주연에 의해 성추행범으로 몰렸던 사건에 대해 말하며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선생님들의 말에서도 진실이 등장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진실과 억울하게 누명을 입었던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면서, 어른에 해당하는 교사들에게도 진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함을 보여준다.

다양한 교사들 중에서도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교감 선생님에 주목하고자 한다. 교감 선생님은 진실을 넘어 그 안에 숨은 언론의 야비함과 인간의 아픔을 포착한다. ‘34. 교감 선생님에서 피디는 교감 선생님을 찾아간다. 피디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 아닌, 교감 선생님이 직접 피디를 부른다.

 


 온 세상 사람들 눈이 다 우리 학교로 쏠려 있는 지금 이 시점에, 방송을 그렇게 내보내시니 저희 입장이 얼마나 곤란한지 모릅니다. 아직 재판이 끝난 것도 아니고 진행 중인 상황인데, 방송을 너무 편파적으로 하셨더란 말입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라고요? ,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바로 그겁니다. 본질. 어째서 피디님은 언론을 이용해 본질을 흐리고 계십니까.

 피디님은 정말 그 방송이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안타깝게 죽은 학생을 위한 일이라고요?  …  그 방송 이후로 박서은 학생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소문 말입니다. 압니다. 저 역시 소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런 걸 말하자는 게 아닙니다.

아니요. 진실은 경찰이, 판사가 찾아내는 겁니다. 그걸 왜 방송국에서 하려고 하십니까? 그 일은 아이들한테도 엄청난 상처입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묻고 다니시면 아이들한테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라는 것밖에 더 됩니까?

- <죽이고 싶은 아이>, 164-166

 


 피디가 내보낸 편향적인 특집 방송에 대해 교감 선생님은 정곡을 찔러가며 비판하고 있다. 기사나 방송 등은 경제적 이익 취득의 목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가며 만들어진다. 기사를 읽는 독자나 방송을 보는 시청자의 관심을 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려고 시선을 끌 만한 내용을 다룬다. 그 과정에서 진실은 사람들의 무성한 소문들 아래에 덮이고 묻혀 사라진다. 교감 선생님은 그런 언론의 실태를 피디에게 직접적으로 말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아픔에 공감한다. 이 대목에서 처음 등장한 교감 선생님의 말에는 단순한 언론의 문제점만을 보는 것이 아닌, 죽은 사람과 힘겨워하는 유가족, 주변 사람의 감정에는 무관심한 채 흥밋거리들만 뽑아내려고 하는 사회의 실상이 내포되어 있다. ‘소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넘어서 인간을 바라보고자 하는 어른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이 책은 청소년 소설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른들이 주목해야 할 책이다. 특히 교사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다만 교사가 이 책을 읽을 때, 책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교육에 초점을 많이 두지 않은 것이다. 학생과 교사를 등장시키며 청소년들의 세계를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했다면, 그들을 둘러싼 학교에서는 어떻게 교육을 하면 좋을지 그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교사가 이 책을 읽는다면 학생들의 관계 속에 감춰진 그들의 자세한 심리를 확인하고, 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공감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학교 현장을 보면, 미디어 교육이란 그저 관련 영상물을 보여주거나 외부 강사의 간단한 강의가 끝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미디어 교육에 열을 올리고자 한다면 정말 학생들이 무언가를 깨닫도록 해야만 한다. 이 교육은 교사에게 주어진 일이다. 미디어에 노출되기 쉬운 학생들에게 가짜 뉴스의 위험성과 비판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진실에는 귀를 닫은 채 흥미로운 얘깃거리만을 찾는 언론의 실상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학생들은 SNS를 통해 언론이 다루는 정보를 아주 빠르게 흡수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태도가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언론을 접하는 우리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무수한 소문들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정보를 접하게 되면 그것을 믿을지 말지 선택한다. 이제 막 학교라는 사회에 던져진 청소년들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을 무분별하게 믿기로 선택하지만, 시간이 흘러 각각의 신념과 가치관이 생긴 우리는 이제 이것은 믿고 저것은 믿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믿음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일까? 믿을 수 없는 것이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믿음과 관련된 그 많은 문장들 중에서도 우리는 어떤 문장을 믿을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판단이 흐린 상태에서 생겨난 믿음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 놓인 정보가 누구와 연관되어 있고, ‘보내졌으며, ‘어디서왔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진다면, 누군가는 서은이 되고 주연이 될 수 있다. “나는 널 믿어.”라는 응원이 담긴 말조차도 믿지 못하게 되는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믿음을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소문 아래에 자리한 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 홍수현 / 외부청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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