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아카이브 기행

이육사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작성자 정보

  • 작성일
  • 조회 434
  • 작성자 관리자

컨텐츠 정보

본문

 714382f1604997a184129352c33513a6_1654660894_3585.png 

 714382f1604997a184129352c33513a6_1654660906_5275.png 



형태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15*10

날짜 : 1934620

소장 경위 : 복제본(국가기록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원문

()

(사진)

昭和9620日 西大門刑務所撮影

保存原板() 24982

()

氏名

李活

異名

李源三

指紋番號

 

年齡

明治 3844日生

手口番號

 

身分

常民

職業

朝鮮日報工房長

身長

545

特徵番號

 

本籍

慶尙北道 安東郡 陶山 遠川 881

常用手口槪要

生地

慶尙北道 安東郡 陶山 遠川 881

 

住居

慶尙北道 大邱府 南山 662

最近刑

罪名

 

其他前科

檢擧

刑名刑期

 

高等關係

照會用

言渡官署

 

言渡年月日

 

入所年月日

 

出所年月日

 

刑務所名

 

檢擧官署

京畿道 京城本町警察署

 

현대어

()

(사진)

소화96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보존원판() 24982

 

()

씨명

이활

이명

이원삼

지문번호

 

연령

명치 3844일생

수구번호

 

신분

상민

직업

조선일보 공방장

신장

545

특징번호

 

본적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 원천 881

상용수구개요

생지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 원천 881

 

주거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 662

최근형

죄명

 

기타전과

검거

형명형기

 

고등관계

조회용

언도관서

 

언도년월일

 

입소년월일

 

출소년월일

 

형무소명

 

검거관서

경기도 경성본정경찰서


당시 이육사의 상황

   이육사는 193210, 의열단에서 장개석의 중국국민당 지원을 받아 난징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처남 안병철과 함께 입교한다. 이 학교는 의열단장 김원봉이 교장으로 있었으며 육사는 알고 지내던 중외일보기자 윤세주의 권유로 입교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334월에 이육사를 포함한 26명이 1기생으로 졸업한다. 이육사는 졸업 후 도시노동자층에 공산주의 혁명의식을 불어넣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지만 19343월 처남 안병철의 피검 이후 구속됨으로써 그의 활동은 좌절을 맞는다.

   1934년에 이육사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일 이상흔이 京城府 齊洞(齋洞의 오기) 五八 李先生 戮史 活氏 下覽이라 적어 엽서를 보내 왔다. 2월에는 李活이란 이름으로 1934년에 임하야 문단에 대한 희망형상에 발표한다. 320일 조선일보 대구특파원으로 채용되어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322일 처남 안병철의 피검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구속된다. 617, 19서울 본정 경찰서에서 이활신문조서를 작성한다. 620서대문형무소에서 신원카드용 사진을 촬영했으며, 당시 이육사가 체포된 곳은 광화문 앞 본정에 자리한 경기도 경찰부 경성본청이었다. 신원카드 내용에는 신분을 상민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직업은 조선일보 공방장이다. 키는 545분인데 1척을 30.3cm로 계산하면 165cm 정도가 되며, 이는 당시 보통 키에 해당한다. 6월에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된다. 720일 안동 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에서 이원록 소행조서를 작성했으며 8월에 기소유예가 확정된다. 9월에는 이활(李活)이란 이름으로 오중대회를 앞두고 외분내열의 중국정정신조선에 발표, 10월에도 이활이란 이름으로 신조선국제무역주의의 동향, 陸史라는 이름으로 신조선창공에 그리는 마음을 발표한다.

   11월에 작성된 군관학교사건의 진상(조선총독부경무국)’ 내용을 보면 주거지는 경성부 재동 82, 무직, 30, 1기생, 대정9(1920) 본적지의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영천 백학학원(白鶴學院), 동경 세이소쿠예비교(定則豫備校), 일본대학 문과 전문부를 다니다가 병으로 퇴학, 대정15(1926) 북경 중국대학에 들어갔다가 소화2(1927) 중도 퇴학하고 조선으로 돌아옴. 동년 10월 대구의 조선은행지점 폭탄사건으로 검거, 소화4(1929) 5월 면소된 뒤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특파원으로 활동, 소화 7(1932) 310일 봉천(奉天)으로 향함, 그곳에서부터 북경, 천진(天津)을 거쳐 같은 해 10월 훈련반 제6대에 입대, 1933515일 남경을 출발해 바닷길을 이용해 상해를 거쳐 안동현으로 같은 해 714일 상륙, 신의주로 입성, 경기도에서 1934522일 관내를 배회하던 중 검거, 1기생으로서 훈련을 받았을 뿐 조선 내에서는 아직 어떠한 활동사실이 없고 또 고칠 가능성이 현저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소화9(1934) 623일 신병석방, 831일 앞의 의견에 따라 기소유예 처분에 부쳐 송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신준영 / 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Facebook Twitter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 Naver
관리자

관련자료

이육사문학관 (사)이육사추모사업회

우) 36604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
전화: 054-852-7337
팩스 : 054-843-7668
이메일: yuksa264@daum.net
개인정보보호책임 : 윤석일

Copyright 2020 by 이육사문학관 웹진 All rights reserved.